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탈출하려는 욕망에 불타오르는 존재이다. 존재론적으로 그는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깝게 보면 현재 자신의 내적·외적인 발전을 꿈꾸게 되고 넓게 보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의 지향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보면 결국 그는 죽음이라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 역시도 어떠한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적극적 면모를 보이는 주체이다. 그래서 그 인간이라는 주체에 의해 이 세계는 백년도 않되 죽어 썩을 인간의 육체처럼 허망하고 가식적인 물질의 세계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치 신처럼 영원하고 무한한 정신의 세계 즉, 지상계와 천상계라는 이분법의 세계로 재편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이분법의 세계의 핵심은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가 서로 평등하게 놓이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의 쏠림 즉, 후자에 대한 전자의 복종이라는 특성에서 잘 나타나게 된다. 특히 서양에서의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론은 이런 인간의 이분법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동굴에 의한 비유는 현상 세계를 천상 세계를 위한 전초 기지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철학 담론은 기독교의 천당과 지옥이라는 또 다른 이분법적 정의의 종교 담론으로 계승되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종교 담론은 철학 담론에 비해 더욱 실천적이고 강제적인 기능을 수반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종교 담론의 실천성과 강제성이 만드는 억압이 사람들의 또 다른 안식처가 되었다는 점도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안식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사람마다 달랐을 뿐이었다.

 

브라우닝(Browning)‘Fra Lippo Lippi’는 앞서 서술한, 수천 년 동안 쌓여온 거대 담론 혹은 이데올로기(Ideologie)에 반기를 드는 수사의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 형식의 시이다. 여기서 그 반기의 주체자의 직업이 수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작품에서 설정된 시기가 중세 말기에서 르네상스 초기라는 점(시의 17연에서 Lippo 수사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Cosimo of the Medici(1389~1464)는 이탈리아(피렌체) 르네상스의 전성기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으로 미루어 보아 수사라는 직업은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체계를 수호하는 집단의 대표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결국 Browning은 진보와 보수라는 상반되는 이미지를 결합시켜 그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반대자가 대항하는 그 이데올로기의 중심부에 있어야만 그것의 문제점, 그것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그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서 그런 행위의 주체가 나왔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계급을 대표하는 행동일 뿐인, 상대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부족한, 단지 한쪽에만 치우친 행위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Lippo 수사가 아기였을 때 부모가 죽고 거리에 버려졌다는 점(I was a baby when my mother died And father died and left me in the street, 1263)도 그의 반란의 핵심적인 근원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다니엘 디포(Daniel Defoe)Moll Flanders처럼 상징계(Symbolic)적 질서로의 편입 도중의 붕괴는 일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상징계적 질서를 만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요컨대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밖으로 떨어져 존재하다가 다시 편입해 들어와 기존의 상징계적 질서와 맞서는 이에게서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다. 종교 담론과 같이 기존의 질서는 그 휘하에 있는 개체에 비하여 너무나 강력하고, 설사 대항할 수 있는 개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질서에 맞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사 Lippo는 지금까지 서술한, 기존의 질서와 맞서는 (혁명적) 주체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매춘부와 쾌락을 즐기려다가 잡히고(And here you catch me at an alleys end Where sportive ladies leave their doors ajar?, 1261) 권력자의 이름을 빌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And please to know me likewise, Who am I? Why, one, sir, who is lodging with a friend.... Cosimo of the Medici, 1261) 이와 같은 Lippo 수사의 행동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런 점은 우리의 인식 체계가 사회화된,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으로 반증한다. 대부분의 단어들이 그러하듯이 혁명, 반기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가령 가벼움에 대한 혁명은 무거움이고, 통합적이고 중심적인 것에 대한 반기는 해체이고 비종결성으로 언제나 상호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따라, 혹은 사회적 지향성에 따라 한 단어가 내포하는 기의(Signifié)는 변화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수사 Lippo의 행동은 기존의 종교인들의 행동이라는 또 다른 기의와 대립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빅토리아조 혹은 현재까지도) 그렇지만 Lippo 수사처럼 일반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혁명으로 평가받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일탈과 탈선은 새로운 규범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결국 그 일탈이 혁명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길은 시대적 사명이 요구하는 필연성과 부합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당대에는 인정받을 수 없을지라도 후세(역사)에 인정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다시 조명 받는 정조, 광해군 같이 말이다. 문제는 그 시대적 사명은 각기 다른 담론들의 엇갈림 속에 숨어있어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더욱이 동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보다 직접적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인식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Christ)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른다고 말한 거와 같이)마저도 순진한 것이라는 문제제기도 이런 어려움의 또 다른 이유로 등장하였다. 과거의 이론가, 특히 초기 맑스주의자(Marxist)들은 하위 계급의 인식적 깨달음이 일어나면 이 세계는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고수했지만 정신분석학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이런 믿음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른바 알튀세가 말하는 '해방적 주체'는 불가능함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희망은 계속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이것을 관심(interest)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품에서 우리가 당면한 것은 Lippo 수사의 일탈이 혁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Lippo 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발화에 있어 표현의 특성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그의 저서 꿈의 해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발화의 분석을 통해 Lippo의 수다스럽고 감정적인 내용 속에 숨어있는 보다 진실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고 하얀 쥐(a wee white mouse, 1261)', '궁둥이를 맞대고 자초지정을 얘기합시다.(Let's sit and set things straight now, hip to haunch, 1262)', '내 배가 당신 모자처럼 텅텅 비어 있을 때(My stomach being empty as your hat, 1263)', '그렇지만 나의 승리의 짚불은 타오르다가 연기로 사라졌다.(But there my triumph's straw-fire flared and funked, 1264)'등의 Lippo 수사의 표현은 비유적이고 그의 진정한 직업인 화가에 걸맞게, 언어라는 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듯이 매우 시각적이다. 그러나 그의 시각적 묘사는 단지 그의 직업을 암시하는 장치가 아니다. 이런 Lippo의 발화의 시각적 이미지는 수도원장과 학자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예술관과 밀접히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그림에 있어 육체와 숨결, 생명의 불꽃과 영혼을 어우러지게 하여 왜 그것을 삼중으로 고양시킬 수 없는지를 외치고 있다. (Suppose I've made her eyes all right and blue, Can't I take breath and try to add life's flash, And then add soul and heighten them threefold?, 1265) 다시 말해서 그는 상관들이 숭배하는 지토(Giotto)의 예술관에, 즉 육체를 경시하고 영혼만 숭배하는, 가식적인 당대 예술관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 반기가 그의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관에 대한 비판을 넘어 당대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다. (You tell too many lies and hurt yourself, 1266) 그는 이런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은 결국 해석자들의 왜곡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서 기존 해석자들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I always see the garden and God there A-making man's wife, 1266) 또한 Lippo와 신 사이의 직접성은 육체와 영혼의 직접적인 연결을 주장하는 그의 예술관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가는 신의 작품(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시각적 이미지가 수도원장의 질녀에게서 정점을 찍게 되는 점도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다른 이미지에 비해 그녀의 이미지는 유사하지만 또한 사뭇 다른 뉘앙스의 의미를 발산하고 있다. stornelli의 형식으로 금작화(broom)부터 시작된 다양한 꽃의 이미지의 은밀한 제시는 수도원장의 질녀에게서 만개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수호성인(patron-saint)이자 헤로디아스(Herodias)이고, 성 루시(Saint Lucy)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Lippo 수사에게 있어 가장 어여쁜 얼굴이자, 춤을 추고 남자들의 목을 자른 여자이고,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교회에도 이득이 생기게 해준 은밀한 욕정과 은인을 표상한다. (‘헤로디아스라는 표현은 물론 수도원장의 해석이긴 하지만 수사 Lippo는 이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오랜 남성들의 성적 억압을 파괴하는 헤로디아스의 이미지는 Lippo의 추구와 아주 잘 부합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욕정이라는 인위적으로 매겨진 성욕의 부정적 버전(version)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릴 것이다.) 결국은 수도원장의 질녀는 Lippo 자신에게 스승이자 가장 이상적인 육체 즉,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수사로서 가장 금기시되는 이성에 대한 사랑은 예술가라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진 Lippo에게는 반드시 열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그의 어린 아이 시절의 거리 생활로 터득한 생생한 육체의 세계는 관능의 세계에서 그 가능성이 만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예술가로서의 자아는 수사로서의 자아 즉,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관문을 열어젖힌 Lippo는 그의 예술관을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역으로 수사로서, 이데올로기가 정해준 금기를 어긴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 두 번째 버려짐은 스스로 감당해야할 몫으로 남게 되었다. 아무튼 Lippo는 자신의 예술에만 집중하고 있고 우리도 그와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정말로 Lippo의 예술관은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과 시험을 통해 구체화되었고 정립되었다. 그는 예술이 하느님의 작품인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능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이미 완벽한 자연을 그 이상이 되게끔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이 점이 예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자연을 창조하고 예술가는 그것 이상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만이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도 창조주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아래 Lippo의 마음속에서 하느님과의 새로운 합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불어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Lippo는 자신의 생각이 현실 세계에 바로 반영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귀디(Guidi) 같은 자신의 후계자를 통해 자신의 신념이 역사적 필연성과 만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I hope so-though I never live so long, I know what's sure to follow, 1267)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서 먼동이 트려고 할 때 투덜거리며 서둘러 돌아가려는 Lippo 수사의 모습은 모순적인 하위 계급의 면모를 또한 잘 드러나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사실 그는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모순적인 면을 청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Lippo 수사는 한편에서는 메디치 집안을 인심 좋은 권력가로 묘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은 일찍이 버린 쓰레기를 아직도 마음속에 소중히 담고 있는 가련한 악마들로 묘사하고 있다. , 언제는 메디치 집안 덕분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다른 대화에서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자신을 동정을 바라는 듯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구속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선언하는 동시에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는 오래된 회초리, 늙고 엄숙한 눈이 보인다는 자기고백은 Lippo 수사의 분열적 자아를 더욱 극명히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모순적·분열적 자아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이다. 하지만 여기서 위의 예에서 말해주듯이 타자는 일반적으로 주로 메디치 집안이나 수도원의 높은 분들 같이 힘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타자는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결국 Lippo 수사는 메디치 집안의 코지모(Cosimo) 어른이나 수도원장이 아니라 수도원장의 질녀나 귀디를 대할 때에도 다른 자아로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자의 타자들은 Lippo를 수사의 옷을 입게 하고, 육체를 억압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만들게 하는 반면 후자의 타자들은 그를 진보적인, 시대에 반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만드는 예술성을 추구하는 화가로 만들게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Lippo의 내면에서 이런 차이의 대립이 일어나고 그것이 그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자아 안의 타자들의 대조는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끊임없이 도플갱어(Doppelgänger)들로 분화하는 숲에서 자신의 또 다른 도플갱어를 죽이는 그, 결국 그는 자신의 대부분의 자아는 파괴되고 미미한 파편만이 남게 된다. 이 판타지 소설에서 매우 극적으로 묘사되는 이 차이, 대조는 시의 마지막, 동틀 무렵의 Lippo의 투덜거림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Lippo내의 한 도플갱어가 또 다른 도플갱어들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는 Lippo의 자아 전체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 브라우닝의 시 'Fra Lippo Lippi'의 화자 Lippo라는 수사이자 화가는 실제로 브라우닝 자신이 아니냐하는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인간의 적나라한 심리를 극적으로 제시하는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시풍과 정신적인 것에만 매달려 육체를 경시하는 당대 예술관에 일침을 가하는 Lippo 수사의 르네상스적 예술론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브라우닝이 당대 영국의 현실을 견디지 못해 이탈리아로 도피했다는 점은 Lippo 수사의 고민과 비슷한 점이 그에게도 있었다는 추정을 충분히 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Lippo가 브라우닝이냐 아니냐는 크게 의미가 없다. 그것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행위는 시가 내포하고 있는 핵심적 의미를 흐리고 그것과 관계없는 부차적 목적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의미가 분명 존재한다. 대다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펴나간다. 왜냐면 그것이 가장 자신의 진실성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작가의 모든 작품이 자서전적인 형태를 띤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 자신의 내면은 프리즘(prism)인 것이다.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해서 스펙트럼(spectrum)으로 분해되듯이 세상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분해되어 작품으로 보이게 된다. 차이는 단지 그것이 빨강(굴절이 가장 덜 되는)이냐 보라(굴절이 가장 많이 되는)냐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 Lippo 수사는 브라우닝의 작품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빨강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냐는 것이다. 지금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이유는 그 논쟁의 결과에 따라 독자의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의 양상은 분명 달라지기 때문이다. , Lippo를 브라우닝으로 보느냐 혹은 그를 시대에 저항하는 예술가로 보느냐는 독자에게 해석에 대한 다른 동기 부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브라우닝 자신도 르네상스 시대의 실제 인물인 Lippo, Cosimo를 끄집어낸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이다. , Lippo, Cosimo가 보여주는 실제 역사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를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의미를 더욱 극대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작가는 단지 자신의 만족, 성취감을 위해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는 타인, 시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서 미래를 만들려는 주체이다. 결국 작가임을 포기하지 않는 브라우닝도 오래 전의 인물들을 통해서 독자, 즉 빅토리아 시대 대중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워즈워스(Wordsworth)의 영원성으로 다시 회귀하려는 칼라일(Carlyle),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생각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브라우닝의 생각은 내용적인 차이를 제외하면은 다른 문학가, 사상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중들을 우매하고 깨우쳐야 할 존재로 보고 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이 그들의 지팡이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맑스(Marx)의 자본론도 그런 맥락에서 집필되었다. Lippo가 자신의 생각이 귀디 등의 후계자를 통해서 만개할 것이라고 믿은 것처럼 맑스도 언제가 자신의 생각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발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소수 지도자 중심의 사회 개혁 운동의 한계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경험하였다. 예를 들어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이런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민족개조론이후의 이광수의 일본으로의 귀결(혹은 변질)에서 드러나듯이 이런 운동은 지도자에 극단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는 문제를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수 주도의 운동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위 문화의 모델(model)을 제시한 월가 시위(Occupy Wall Street)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4.19, 광주항쟁, 6월 항쟁에서 보여주는 우리의 사회 개혁의 운동이 촛불 시위라는 새로운 모델로 전위된 후 그것을 이어가지 못하고 정체된 우리 사회에게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by 그루브21 2014. 12. 11.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