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기 자본주의 논리와 바흐친 학파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그의 저서 포스트모더니즘-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서 현대 사회를 그의 맑스주의(Marxism)적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그의 논지에 따른 현대 사회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역사적 과거와의 단절, 상품화 자체의 소비, 고급문화와 하위문화 사이의 구별의 사라짐, 욕망의 매몰, (디지털)기술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논리를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 책은 90년대 초반(그것은 80년대 저술되었다는 것이다.)에 쓰였기 때문에 이미 30년에 가까운 시간적 간격이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유럽의 정신적-물질적 문화를 토대로 두고 있는)이라는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로 발달한 공간이라는 맥락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Slavoj Zizek)이 그의 최근 저서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재귀적으로만 지향하는 개인들을 비판한 것과 같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는 현재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 폰(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보라. 보편성만 인정받는다면 전 지구적으로 유행되는 것은 순식간이게 되었다. 혹은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보라. 유명인사들의 동참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진 기부 운동은 최근까지 내 자신의 페이스북(Facebook) 친구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으로 인한 지구라는 공동체로의 통합화 현상을 통해 이제는 거리적 의미는 많이 희석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후기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바흐친(Mikhail Bakhtin)이라는 이론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작용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의 동기는 매우 간단하다. 바흐친이 말하는 대화주의 또는 다성성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특히 진보주의자가 말하는) 우리의 역사적 과정의 희망적 방향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질문을 하는 자들은 우리의 역사도 바흐친의 관점대로 흘러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역으로 우리 사회에는 바흐친이 말하는 단성적인 부분들이 아직도 상당부분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예를 들어 현대 문화의 주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영상물도 바흐친의 관점에서 보면 단성적인 문화의 산물이 될 수 있다. 그 영상물의 내용이 바흐친이 제시하는 소위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의 작품 같은 다성성의 특징을 함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을 제시하는 형식이 대부분 극히 직접적(일방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단성성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더불어 그것이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러 특징과 결합될 때에는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바흐친 그렇게 소중히 여겨온 대화주의(역사성)는 그곳에서 소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시대적 상황이 역으로 바흐친을 소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 내에서 바흐친을 호출하는 자들에게는 그가 현대 시대에게 진정한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는 지를 입증해야만 하는 의무가 부과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행위는 단지 일시적 심리적 위안을 위한 것이고, 스스로 자신들이 가식적임을 입증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심리적 위안과 실질적·실천적 위안은 분명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들의 방향은 바흐친의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분석하는 것으로 지향되어야 한다. 바흐친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길은 또 다른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장을 여는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현실적 맑스주의

 

바흐친 학파는 프로이트주의를 비판한 Freudiansim: A Critical Sketch부터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인 The Formal Method in Literary Scholarship, 맑스주의적 언어철학을 확립한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의 작품을 통해서 주체성, 언어관, 이데올로기 개념을 확립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상으로 하는 대화주의의 개념을 확립한 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유럽 소설 다성성의 근본적인 기원을 탐구한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 바흐친 이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카니발 이론의 Rabelais and His World를 통해 실질적 문학 연구와 정치적 비평을 펴나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저작들 모두를 관통하는 기본 사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통합된 주체에 대한 믿음이다.

정말로 바흐친은 이 세계를 통합된 주체를 가진 개인들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자신의 계급성을 표출하는 곳으로 보았다. 개인들이 통합된 주체적 인간이 아니면 그가 매우 중시하는 사회학적 관점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그는 의식을 사회적인 공동의 것으로 보는 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All the fundamental and essential acts in human life are brought about by social stimuli in conditions of a social environment. FACS 22p) 이는 맑스(Karl Marx), 루카치(György Lukács), 알튀세(Louis Althusser)에 이르는 해방적 주체에 대한 열망을 바흐친도 역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흐친의 의식의 공동화라는 설정은 하위 주체의 의한 긍정적 미래 창조라는 또 다른 설정의 근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특히 Rabelais and His World에서 잘 드러난다.) 이점은 바흐친, 그도 역시 맑스주의라는 넓은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본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는 분명 다른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맑스, 루카치, 알튀세는 각각 그 설명의 방법과 양상은 다르지만 오류의 인식에 대한 초월 즉, 목표(혁명, 과학)에 대한 우선 가치를 두었지만 바흐친은 목표보다는 그 과정에 중점을 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에서 기호 체계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설명(differently oriented accents intersect in every ideological sign. Sign becomes an arena of the class struggle, MPL, 23)은 이런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계급들 간의 투쟁마저도 투영시키는 언어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맑스주의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언어의 특징에 대한 분석을 통해 결국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결과 혹은 지향이 아니라 계급투쟁 그 자체 즉, 인간성이라는 본질인 것이다. 그래서 이 본질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듯이 이 계급투쟁은 인간이 없애거나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인간 사회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을 그는 주장한다. 물론 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에서 드러나듯이 지배 계급의 담론의 일방적인 독점은 해체되어야하고 이제까지 억압되었던 계급들에게도 그들의 몫이 주어져야 된다는 맑스주의의 기본 전제를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Dostoevsky carried out, as it were, a small-scale Copernican revolution when he took what had been a firm and finalizing authorial definition and turned it into an aspect of the hero's self-definition.... Not only the reality of the hero himself, but even the external world and the everyday life surrounding him are drawn into the process of self-awareness, are transferred from the author's to the hero's field of vision.... Alongside and on the same plane with the self-consciousness of the hero, which has absorbed into itself the entire world of object, there can be only another consciousness; (TBR 92)

 

요컨대 바흐친은 맑스주의적 지향은 소중히 간직하되 현실적 간격(조건)은 인정하는 현실적 맑스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런 점은 그가 Rabelais and His World에서 언뜻 보면 민중 중심의 유토피아적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허락받고 일시적인 타협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3. 동시 기원적 역사성

 

바흐친이 말하는 대화주의는 역사성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대화주의는 낙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인류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믿는 진보주의자인 것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라는 것 자체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서 미래를 여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경향은 초기 맑스주의의 다른 이론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맑스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소멸되고 공산주의가 그것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본론(Das Kapital)에서 그는 성경의 그리스도(Christ)의 말인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른다.’를 인용하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하위주체(노동자)들의 인식적 깨달음이 일어날 것이고 이것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맑스는 자본주의의 몰락이 아니라 공황을 예언한 것이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수용한다하더라도 맑스가 공산주의를 이상적 정치·경제 체계로 본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루카치는 맑스의 그런 믿음에 계승하면서 그것을 문학 이론에 빗대어 발전시켰다. 그는 리얼리즘(realism) 이론을 통해 에밀 졸라(Emile Zola), 사뮤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등의 작품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그들의 문학이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혹은 비관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그는 역사 내에서 필연적인 당파성(objective partisanship)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들이 그것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을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흐친의 역사성의 개념은 그의 저서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에서 구체화되었다. 대화주의, 다성성을 표상하는 근대의 문학 형식인 소설도 역사적인 대화를 거쳐 왔고, 그것은 19세기 들어 주요한 문학 장르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메니피안(Menippean) 풍자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대화성의 기원으로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런 메니피안 풍자의 시대적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It(메니피안 풍자) was formed in an epoch when national legend was already in decay, amid the destruction of those ethical norms that constituted the ancient idea of 'seemliness'(beauty','nobility'), in an epoch of intense struggle among numerous and heterogeneous religious and philosophical schools and movements, .... It was the epoch of preparation and formation of a new world religion: Christianity. (TBR 192)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바흐친은 사회·역사적 맥락이 당대 문학 형식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세기 소설이 당대 주요 문학 형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근대화에 의해 비롯된 자아의 확장이라는 시대적 맥락과 관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은 라블레(François Rabelais)와 르네상스(Renaissance)와의 관계와 같이 바흐친에게는 중심 체계가 유연해지는, 대화성이 극대화되는 시대가 이상적인 시대인 것이다. 이런 그의 이상성은 카니발(carnival)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바흐친도 역시 루카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반영론(Reflection theory)이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는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 correspondence established itself remains without any cognitive value until both the specific role of the "superfluous man" in the artistic structure of the novel and the specific role of the novel in social life as a whole are elucidated. Surely it must be clear that between changes in the economic state of affairs and the appearance of the "superfluous man" in the novel stretches a long, long road that crosses a number of qualitatively differently domains, each with its own specific set of laws and its own specific characteristics. (MTPL 18)

 

바흐친은 그의 이론이 실천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특히 마이클 가디너(Michael Gardiner)는 그람시(Antonio Gramsci)를 통해서 그의 이론이 구체성이 결여된 이론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혁명(1956-os forradalom)의 실패로 가장 큰 정치적 위기에 빠졌던 루카치가 장르 비평을 한 것처럼 바흐친도 문학 비평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현실에 반영하려 했다. (한편 문화 비평가 이택광은 바흐친이 루카치의 부르주아(bourgeois)적 문학을 비판하기 위해 문학에서의 민중성을 더욱 강조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는 맑스주의 내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라블레를 재평가 했다. 그런 재평가를 통해 스탈린주의(Stalinism)와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대항하려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임무를 역사성의 필연성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았고 그것을 수행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바흐친은 역사성(리얼리즘)을 바라보는 관점은 루카치와 사뭇 달랐다. 이택광은 바흐친이 루카치의 소설론에서의 일률적인 진행론을 비판하기 위해 동시 기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로 바흐친은 메니피안 풍자 외에도 그리스 로맨스, 아풀레이안(Apuleian) 플롯, 고대 전기 문학을 근대 소설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이미 근대 소설이 지금의 틀을 갖추기 훨씬 이전부터 그 가능성은 안보이지만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이 점은 그가 단순한 진보주의자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에게 이상적인 인간은 도착점을 향해 최선을 다해 내달리는 육상선수가 아니라 언제나 순간순간의 화음을 최고의 음악으로 만들어내려는 재즈 뮤지션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인류 최고의 음악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기 때문에, 발굴해 내야하는 것이다.

 

4. 카니발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문화

 

바흐친이 Rabelais and His World에서 말하는 민중성 혹은 카니발성(carnivalesque)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의 특징 중 하나인 역사성의 상실의 징후와 유사한 면이 있다. 바흐친이 말하는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에서의 공식 문화에 대한 조롱과 야유를 위한 행위와 제임슨이 말하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인 역사성의 상실로 인한 결과는 외향적으로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이론에 대한 근거, 평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범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합의이다. 실제로 바흐친은 카니발성을 우리가 지향해야할 가치로 보고 있고,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실패한 것으로 분석하고 그것으로부터 긍정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는 점에서 이 두 이론은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제임슨이 말하는 역사성의 상실을 기존의 경전, 전통, 고전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본다면 어떨까? 혹시 바흐친이 말하는 공식 문화에 대한 조롱과 야유가 궁극적으로 간다면 제임슨의 역사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편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특징 중 하나인 고급문화와 하위문화 사이의 구별의 사라짐을 미학적 대중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학적 대중주의는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제임슨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호의 농사꾼의 신발과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에서 비교되듯이, 본격 모더니즘 시대에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오면서 이제는 텍스트나 환영이 된 대상세계 자체와 주체의 기질 속에 생겨난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가장 뚜렷한 추세가 바로 정서의 퇴조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주체가 소멸된 것에서 그 근원을 따질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표현이란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151)

 

이를 통해 정서의 퇴조역사성의 상실고급문화와 하위문화 사이의 구별의 사라짐이라는 또 다른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특징과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제임슨이 말하는 다른 특징들 즉, ‘상품화 자체의 소비’, ‘욕망의 매몰’, ‘(디지털)기술들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 이런 특징들이 모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상품화 자체의 소비’, ‘욕망의 매몰’, ‘(디지털)기술이라는 현대 문화의 특징은 우리에게 제임슨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그에게 있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서 이루어졌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문화인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개인들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것에 익숙하다. 예컨대 200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신문과 방송들은 빈번히 이 시대를 자기 PR의 시대로 포장하면서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제는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끊임없이 상품화하려는 욕망에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다시 정정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개인들 즉, 자본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인들이 늘어난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신문과 방송 등의 매체의 내용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말이다. 불륜 드라마가 많아져서 불륜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불륜이 많아서 불륜 드라마가 많아졌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자기 자신마저도 상품화하려는 욕망이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ocial networking service, SNS)를 통해서 범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그런 인식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SNS를 통해서 친구들 혹은 친구의 친구들의 자기 상품화에 실시간으로 무방비 노출되게 되었고 나 자신도 그들 이상의 상품적 가치를 띄게 되기를 열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새로이 유행하는 인스타그램(Instagram)이라는 SNS는 그런 자기 상품화의 장의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곳에서 우리는 범지구적인 범위에서의 불특정 다수들로부터 자신의 식스팩, S라인 등을 드러내는 자기 상품화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프란시스 윈(Francis Wheen)은 맑스가 자본가를 뱀파이어(Vampire)로 비유했고 그들의 잔치가 끝나도 뱀파이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그의 저서 자본론 이펙트에서 말하고 있다. 맑스의 예언은 너무나 옳았다. 이제 우리는 그 뱀파이어의 습격을 당한 좀비(Zombie)들의 방황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임슨의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바흐친의 문화 논리에 다가서면 그의 이론은 전혀 다른 맥락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흐친의 이론에는 제임슨의 것에 비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점은 제임슨 말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아도르노(Theodor Adorno)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The Frankfurt school)와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결국 그에게 당면한 과제는 자본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에게 실질적 위협으로 작용한 스탈린주의의 타도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루카치의 비교에서 드러났듯이 보편성에서 대한 무의식적 애착이 그에게 중대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5. 확장된 의심

 

바흐친은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에서 구주조의 언어관(Structural linguistics)을 강하게 비판한다. , 언어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말하는 자의성을 가지고 단순히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계급층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굴절된다는 것(Existence reflected in sign is not merely reflected but refracted, MTPL 23)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초기 맑스주의 관점 내에서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바흐친의 언어관은 주체성에 관해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그의 언어관은 너무나 단순화되었다. 그는 주체와 언어 사이의 관계를 일대일 대응 관계로밖에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통합된 주체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그 주체는 할 일이 없어지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이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맑스주의자가 고심하는 문제이다. 이에 지젝은 그의 저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 하나이다에서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의 문제제기를 단순히 말하자면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는 즉, 지배계급에 투표하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이다. 알튀세의 논지에 따르면 그들은 이데올로기(대타자)에 호명된, 이른바 그들에게 개조된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알튀세의 그런 분석을 거부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 맑스의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을 알면서도 그것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심리는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풀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무의식, ,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부른다. 이 주이상스는 금지라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법에 의하여 각기 다른 증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젝의 생각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재계(Real)와 상징계(symbolic) 사이를 부유하는 의심스런 주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주체 자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는 지젝의 생각은 역사를 대화적인 것으로 보는 즉, 지향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바흐친에게는 당황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런 생각을 통해서는 그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민중성도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맑스주의자가 결코 정신 분석학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남을 받아들이면 자신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주체는 항상 사회·역사적 맥락 밖에 존재하는, 기존의 질서로서는 도저히 파악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서태지가 그러했고 노무현이 그러했다. 그들은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 같은 기존의 틀을 깨는 자들이었다. 존재가 존재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항상 변함없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제의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보이는 곳에서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푸코는 매우 실천적인 이론가이다. 푸코(Michel Paul Foucault)는 지식이라는 담론(discourse)을 근본적으로 의심했다. 바흐친의 이론으로 예를 들자면 단성성/다성성 같은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이분법보다는 푸코는 어떻게 담론이 형성되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식의 고고학 등을 통해서 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지식은 명제, 지식 체계, 이념(idea) 순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도달한 결론은 바흐친을 비롯한 맑스주의자가 말하는 당파성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부 지식인 주도의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정말 중요한 몫은 대중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인은 대중들에게 방법론만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방법론은 담론 형성 자체에 대한 의심이었고 이것을 대중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The Dialogics of Critique에서 가디너의 말처럼 바흐친은 푸코의 근대성에 대한 의심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실천성을 위한 주안점은 달랐다. 바흐친은 이 세계를 철저하게 계급투쟁의 장으로 인식했고 그곳에서 몫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것의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상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푸코는 그런 것보다는 그런 담론들의 분화(계급투쟁에 의한)의 과정 그 자체에 중요한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의 체계를 분석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실용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적인 세계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 두 이론가 사이의 일치점이 분명 존재한다. 바흐친이 소설에 있어 작가만의 담론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작가, 주인공, 인물들 사이의 다층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것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했듯이 푸코는 어느 특정한 지식인, 혹은 정치가의 주장에 이끌려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우리가 2008년 촛불 집회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듯이 푸코는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문화 운동으로부터 진정한 변화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by 그루브21 2014. 12. 24. 0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