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시간의 축적이었다. 이런 욕구에 의하여 철학, 도덕,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고 인간들도 그것들에 의하여 염원이었던 진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서 종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종교가 철학과는 달리 신에 대한 수동적 의지(依支)를 허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에 대한 의존을 통하여 종교는 인간에게 미지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고 미래와 죽음의 불확실성에 대한 심리적 해결책까지 인간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을 통하여 더욱더 인간에게 더욱더 큰 믿음을 갖도록 해 주었다. 개인보다는 타자와의 공존이 인간에게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성은 인간의 독립성에 대한 나약함에 비롯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종교는 그런 자신만의 특징으로 그렇게 인간에게 군림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역으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신성화되는 절대적인 권위를 인간에게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 신성화되고 절대적인 권위인 종교는 때로는 다른 진리에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키려는 지배 집단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자신의 본질적 존재 이유를 자신의 체계 유지를 위해 망각하고 타 진리를 배척하는 것은 이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하는 독재자와 동등한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문제도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라는 점을 알려준다. 더욱이 점점 집단화되는 현대 대다수 종교의 특성으로 볼 때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종교 내에서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포함해 여러 영향으로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종교(인간)의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는 신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이전까지는 겪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에 의하여 크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흔들림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에 의해 더욱 표출 되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학, 문학 등 모든 사조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단지 20세기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 이미 중세 시대부터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런 진리에 대한 위기는 크게 세 가지 사건에 의하여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의 지동설이고 두 번째가 다윈(Darwin, Charles)의 진화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다. 위의 세 가지 사건 모두가 함유하고 있는 공통점은 자만하고 오만했던 인류의 환상을 깨부수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본질적 근거였던 환상들이 세 사람의 실증적인 입증에 의해 깨지게 되자 인류는 본질적인 존재의 이유에 대한 어둠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산업 혁명으로 비롯된 런던 스모그같은 환경적 재앙과 제국주의에 의하여 비롯된 인간의 의한 인간의 착취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로 인하여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혐오와 의심은 극에 달했다. 이는 기존의 종교와 철학이 수천 년 동안 발전하고 축적됐음에도 이런 인간의 악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과연 종교와 철학은 무엇이며 어떤 가치가 있는지, 선과 악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에 대한 의심을 촉발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 소설 'Young Goodman Brown'은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 이 단편 소설의 브라운의 모습과 많은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굳건한 가치관 속에서 선과 악의 질서의 파괴에 의하여 브라운이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봄으로서 위기에 처한 현대 인류의 해결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주요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브라운의 변화의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Young Goodman Brown’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Brown 앞에 붙여진 Goodman과 그의 아내의 이름 Faith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히려 너무나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수식어여서 오히려 감추고픈 무언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Goodman 앞의 수식어 Young이라는 형용사는 긍정에 긍정을 덫 붙이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무언가가 필요치 않은 완벽한 현실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야기 시킬 것 같은 불안감을 독자들에게 심어준다. Young이라는 단어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기존 체계의 전복을 꿈꾸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아내의 이름인 Faith라는 단어도 복합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우선 그녀가 남편을 의심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이름(Faith)이 그 의미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페이스의 의심은 Brown이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적으로 그녀는 Brown이 세일럼 마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믿음을 잃어버릴까봐 그를 의심하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남편의 믿음이 그의 숲으로의 외출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한 그녀의 제지는 그녀와 Brown 사이의 공통의 믿음을 지키고픈 관점에서 그녀의 Faith라는 이름을 그녀와 어울리게 한다. 결국은 아내가 지키고 싶었던 Faith의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다른 대상이었던 것이다.

 

".... Pray tarry with me this night, dear husband, of all nights in the year!" .... "....What, my sweet, pretty wife, dost thou doubt me already, and we but three months married!"

 

여기서 아내의 믿음은 종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청교도(Puritanism)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이다. 이는 클로스(Goody Cloyse) 부인이 브라운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쳐준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브라운의 사회는 청교도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교리문답은 청교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의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인디언 주술사를 두려운 악마로서 묘사하는 부분으로 유추해보아 아직 초기 단계인 미국의 청교도들의 정착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단 이런 배경적 추론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나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일럼 마을 사람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는가는 소설 속의 브라운의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나 있다. 늙은 지팡이의 남자가 브라운과 계속 숲에 들어갈 것을 재촉할 때 브라운은 그와 계속 간다면 세일럼 마을의 목사님을 무슨 낯으로 보냐고 하면서 더 이상 숲에 못 들어가겠다며 항변한다. 이 소설은 세일럼 주민들이 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청교도적으로 살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청교도들의 독실한 삶의 동기를 유추함으로서 보다 더 작가가 말하고픈 의미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이미 서문에서 밝혔듯이 종교는 철학이나 윤리학과는 달리 좀 더 대중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집단성은 미국 개척 시기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집단이란 사람들에게 일종의 위로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척 시기 같은 불안정하고 변화가 심한 시기에서는 신이 가지는 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더욱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상황에 놓였을 때는 자신을 위로하고 의지하고픈 대상을 찾으려는 속성을 가지는데 특히 절대적 신을 믿는 종교에서 그 희망을 찾으려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 특유의 내세관을 바탕으로 현세의 불행을 감해주는 것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종교는 생활 도덕으로서 윤리관을 대치하기까지 이른다.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종교에서의 윤리관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그 이유와 그 당위성을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윤리관은 내세관과 연결되어 사람들에게 더욱 더 지켜야 할 덕목으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런 광범위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에 지나친 절대성을 부여해 다른 종교, 집단에 대한 배타성을 띄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는 본질을 배제한 체 형식에 집착하는 인간들의 오류에서 비롯됐다. 자신들의 종교와는 다른 의식과 절차를 관용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미개하고 자신들의 종교가 말하는 악마의 형상으로서 비난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11세말부터 약 200여 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가톨릭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함에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 이전부터 이미 가톨릭과 이슬람교는 서로 다른 유일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존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그것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거기다가 이런 종교적 명분뿐만 아니라 봉건영주, 기사, 상인, 농민 계층의 저마다의 세속적 욕망과 합쳐져 광기의 종교 전쟁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런 종교적 마찰은 한 종교 내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에서의 마녀 사냥이 대표적이다. 마녀 사냥은 종교 전쟁, 기근, 흑사병 같은 파국적 상황에서 가톨릭의 지배 계층이 이런 불행을 설명하기위해 평범한 사람을 마녀라는 가상의 허울을 씌어 자신들의 권위를 위한 희생양으로 만든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십자군 전쟁과 마녀 사냥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의 타락에서 시작된 청교도 자신마저도 가톨릭의 모순과 타락을 되풀이 하는 점에서 자기 분열적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Ha! ha! ha!" roared Goodman Brown, when the wind laughed at him. "Let us hear which will laugh loudest! Think not to frighten me with your deviltry. Come witch, come wizard, come Indian powwow, come devil himself, and here comes Goodman Brown. You may as well fear him as he fear you!"

 

브라운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대인 클로이즈 부인, 목사, 구킨 집사,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페이스마저도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자 자신의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청교도적 자신의 이상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인디언 마술사도 악마도 브라운에게는 허상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브라운은 사실 십자군 전쟁과 중세의 마녀 사냥에서 순진하게 가톨릭의 지배 계층이 허울로 내세웠던 정당성을 순진하게 믿었던 대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브라운은 청교도라는 권위가 내세운 정당성을 비판적 시선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정신적 시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브라운은 청교도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의지를 대신해 줄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청교도의 노예로 절락시켰다. 이는 독일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악의 평범성과 맥을 같이 한다. 아이히만이 비판적 사고의 부재로 히틀러의 수많은 유태인 학살에 한 역할을 담당했듯이 브라운도 그의 조부가 퀘이커 여자를 채찍질하고 부친이 인디언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그런 청교도의 만행에 암묵적 지지자였다. 브라운 자신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브라운은 악마들로 뒤덮인 숲에서 악마와의 단절을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악마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브라운은 자신이 이 타락한 세계에서 정조를 지키는 마지막 수호자로서의 자부심이 충만하지만 타락한 세계의 원인, 타락한 세계가 무서워하는 악마에 대한 근거의 결핍으로 그의 자부심은 광기로서 비추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관과 자신이 부정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관의 충돌이 그를 더욱 광기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Either the sudden gleams of light flashing over the obscure field bedazzled Goodman Brown, or he recognized a score of the church members of Salem village famous for their especially sanctity. Good old Deacon Gookin had arrived, and waited at the skirts of that venerable saint, his reverend pastor. But, irreverently consorting with these grave, reputable, and pious people, these elders of the church, these chaste dames and dewy virgins, there were men of dissolute lives and women of spotted fame, wretched given over to all mean and filthy vice, and suspected even of horrid crimes.

 

브라운의 광적인 반항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고 나약함을 나타내는 역설적 표현이었다. 단수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래서 세일럼 마을의 신성한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범죄라도 저지를 것 같은 악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브라운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모든 당위성이 해체되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브라운의 이 당위성에 대한 믿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의 어떤 경험보다도 더욱 큰 충격적 경험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런 브라운의 경험은 서양 문명의 수천 년간 전개되어온 이성중심주의의 파괴에 대한 상징이었다. 서양의 이성중심주의는 육체에 대한 정신의 지배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플라톤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양의 철학은 항상 이성의 주체인 정신이 탐욕적이고 본능적인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고히 해왔다. 그래서 육체의 논리, 즉 본능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 아이라는 존재는 이성의 논리의 의하여 훈육되어야 할 존재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성의 완성체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존재가 벌이는 악행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서 수천 년 동안 공들여 만들어져온 이성중시의 논리는 토대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이는 물론 모든 어른이 이성의 완성적 존재라는 가정을 근거에 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같은 위대한 사유의 철학자조차도 히틀러의 인종우월주의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이성주의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한 무의식의 연구는 기존 이성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단죄의 역할을 하였다. 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가지는 혁명성은 프로이트 자신도 인지하고 있어서 자신의 책의 출판을 새로운 세기를 여는 1900년에 맞추어 출판하기 위하여 출판 시기를 몇 년 미루었을 정도였다. 절대적 이성의 힘으로 통제되는 통합된 주체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서양 지성인들의 전제는 무의식의 발견으로 분열되고 통합될 수 없는 주체라는 새로운 시험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This night it shall be granted you to know their secret deeds; how hoary-bearded elders of the church have whispered wanton words to the young maids of their households; how many a woman, eager for widow's weeds, has given her husband a drink at bedtime and let him sleep his last sleep in her bosom; how beardless youths have made haste to inherit their father's wealth; and how fair damsels-blush not, sweet ones-have dug little graves in the garden, and bidden me, the sole guest, to an infant's funeral.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서 자신 스스로를 깨끗이 지키려는 청교도(Puritan)에서도 인간의 악행이 되풀이 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나이가 많이 들어도 자신의 욕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교육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인가? 결국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이제 없는 것인가?

이런 물음은 자칫 인간 혐오주의로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허무주의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허무주의는 사람들이 가장 피해야하는 사유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요즘 많은 사람들을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몰아가는 것의 원인 깊숙한 곳에는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 사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무주의가 우울증의 형태뿐 만이니라 전 사회·국가를 아우르고 변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관을 지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염세주의적 세계관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프로이트가 우리의 주체가 분열되어 있다고 밝힌 것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를 억누르고 억압할수록 통제되지 않은 무의식의 욕망은 더욱더 커져간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텍스트에서 청교도의 교리가 세일럼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 억압이 사람들의 무의식을 왜곡하고 과장되게 표출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된 무의식은 해방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일럼 마을 사람들의 숨겨진 간음, 살인, 패륜, 낙태 등의 이런 악이 가지고 있는 욕망도 드러나야 한다. 그런 극한 악적인 면도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인 무의식으로 인정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깨끗한 것은 가장 더러움에서 나오고, 가장 밝은 빛은 가장 깊은 어두움에서 나온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더러움과 어두움이 없으면 깨끗함과 빛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처럼 선과 악은 서로 양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브라운을 악의 길로 인도하는 목소리가 악은 사람의 천성이라는 꼬임은 그 말 자체의 의미로는 옳은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의가 말하는 선과 악의 개념조차도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윤리관에서 좀 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이성의 주체에 완전히 억압되지 않듯이 선과 악의 윤리관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자칫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성이라는 속성이 물질적·정신적 권력에 자유로울 수 없는 왜곡된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성의 힘은 이제까지의 인류 문명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추후로도 이성의 중요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점이다. 브라운의 세계를 보더라도 세일럼 마을의 전 인원이 청교도의 정신을 밑바탕으로 삼아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악행의 진위 여부는 사실 명백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일럼 마을 사람들이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완벽한 조화 속에서 살았지만 브라운은 무언가 그들과 다른 면을 내재하고 있었다. 브라운은 자신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악마적 목적(evil purpose)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재촉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자신은 자신이 악마라고 생각하는 대상과 확고한 단절을 정립하고 빨리 자신의 이상인 아내로 돌아갈 것을 희망했다. 이것은 우리는 이러 브라운의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그는 자신의 Faith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는데 왜 악마적 목적인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재촉했을까? 그렇다면 브라운은 자신의 하녀에게 음란한 말을 속삭이는 교회의 연장자와 같은 위선자인가?

하지만 브라운을 세일럼 마을 다른 위선자들과 동등한 위치로 세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단편 소설의 후반 부분에서의 브라운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브라운이 다시 세일럼 마을에 복귀 이후 그와 마을 사람간의 급격한 단절은 충격으로서의 경험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제는 클로이즈 부인을 자신의 어릴 적 선생님으로도, 목사님의 설교를 열성적으로 경청하지도, 자신의 부인 Faith를 믿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 자신 주변 사람들을 혐오하는 냉혹하고 회의적인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숲으로의 하룻밤 여행이 그에게는 충격으로 작용하였지만 이는 모든 인간에게 같은 의미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운 내부에 숲에서의 경험과 반응을 일으킬 인자들이 있을 경우에만 그는 충격을 충격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Faith나 클로즈 부인, 구킨 집사, 목사 같은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브라운 같은 충격으로서의 경험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브라운은 자신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믿었지만 악마적 목적인 여행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이것은 브라운이 세일럼 마을의 다른 사람과는 달리 적나라한 현실을 의심하고 직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And when he had lived long, and was borne to his grave, a hoary corpse, followed by Faith, an aged woman, and children and grandchildren, a goodly procession, besides neighbors not a few, they carved no hopeful verse upon his tombstone; for his dying hour was gloom.

 

하지만 충격으로서의 경험은 항상 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충격을 외면할지 아니면 맞서 대응할지는 또다시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브라운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외면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악에 대해 혐오감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정의를 실현할 소명을 외면해 결국 수동적이고 비겁한 방관자로 남았다. 이는 니체가 인류에 대해 가장 경계했던 허무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니체가 허무주의가 팽배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건강한 인간상을 소망했듯이 호손도 브라운이라는 혼돈의 인물을 통해 이 세계가 좀 더 건강한 세계가 될 것을 역설적으로 희망했다. 그리고 또한 호손은 혼돈(Chaos) 속에서 조화(Cosmos)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by 그루브21 2014. 2. 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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