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중상주의(Mercantilism)를 반대하며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시장의 자율적인 경제 체제를 주장하였고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Das Kapital)을 통해서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자본가에게 착취당할 위험을 노동자에게 경고하였다.(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제4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참조) 그들 각각의 이론은 그 시대의 배경을 바탕으로 태어났고 그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탁월하였던 그들의 이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허점을 보이고 만다. 이런 이론의 해체는 필연적인 것이다. 이 필연성은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주체에 의하여 비롯된다.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의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는 이런 불완전한 주체인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불완전함은 변동성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한곳에 멈추어있지 않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멈추어 있음은 인간에게 살아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재생산해야하는 숙명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또한 인간에게 힘겨운 시험의 시간을 부과한다. 새로움은 인간에게 동전의 양면처럼 이중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그 양면 중 어둠이 밝음보다 강하게 다가오고 그것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는 종말이라는 문제가 인간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런 어둠에게 인간이 패배하였을 때는 염세주의적이고 고정된 마침내 죽은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메로님(Meronym)은 자크리(Zachry)에게 이렇게 말한다. “프레션트 족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아요.... 우리 진실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요.” (데이비드 미첼. 클라우드 아틀라스 2. 송은주 역 : 문학동네, 2010. 113p 인용) 그녀는 자크리의 계곡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환생에 집착하는지를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여기에서 환생 혹은 영혼의 존재의 유무는 중요치 않다. 그런 그들의 믿음 안에 숨어있는 인간의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인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계곡 마을 사람(Valleysmen)에게 환생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여만 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메로님의 말대로 언제나 진실은 우리 생각 너머에 있다. 그래서 타자에 의해서 강요되어진 진실이 나 자신에게도 진실인지를 묻는 행위가 중요하다. 그런 행위에 충실한 자만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진정 충실한 자가 될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타자는 인간의 본성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더불어서 인간은 무한한 반복 속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아야하는 의무를 지니는 존재라는 점이 도리어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인간의 삶의 영원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어찌 영원을 갈망하지 않겠는가, 반지 중에서도 결혼반지인 회귀(回歸)의 고리를! 나는 아직까지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를 발견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 말고는.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영원이여!” (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행숙 역 : 부북스, 2011. 349p 인용) 니체는 영원을 이렇게 열렬히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찬양을 가능하게 하기위해서는 끊임없는 긍정의 추구라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매순간의 긍정이 따르지 않는다면 영원은 인간을 허무주의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최악의 저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니체는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긍정은 말을 넘어서는 더욱 실질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실질적인 요구는 인간에게 점점 감당하기 힘든 무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앞서 설명한 영원히 반복되는 공간에서 변화와 진리를 찾는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메시지를 생산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작품의 주제가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오랫동안 철학, 문학, 비평 등지에서 연구될 수밖에 없었던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첼은 문학 작품만이 갖는 형식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새로움으로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각 단락마다 각기 다른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그 순서를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연출하여 문학 작품으로서의 특징을 배가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이런 형식적인 실험들이 새로운 메시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감추는데 급급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시도가 보편적이고 동시에 고리타분한 주제에 또 다른 생명을 부여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독자에게 남은 몫이라 할 수 있다.

 

2. 변질되는 근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를 강타한 제국주의(Imperialism)는 피 식민국가의 삶의 양식을 송두리 채 바꿔놓았다. 특히 식민 통치를 받은 많은 국가들에 낯선 타자의 종교가 은밀히 주입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와 같이 종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외에도 그 근저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악한 전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는 종교가 언어, 문화, 정신을 총괄하는 유일한 영역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부터 미래까지의 인류 역사의 이야기를 다루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도 종교를 이용하는 제국주의의 문제는 피하기 어려운 소재였을 것이다.

 

“An idea of Father Upward's, at the Tahitian Mission. You must understand, sir, your typical Polynesian spurns industry because he's got no reason to value money. 'If I hungry,' says he. 'I go pick me some, or catch me some. If I cold, I tell woman, "Weave!" Idle hands, Mr. Ewing, & we both know what work the Devil finds for them. But by instilling in the slothful so-an'-soa a gentle craving for this harmless leaf, we give him an incentive to earn money, so he can buy his baccynot liquor, mind, just baccyfrom the Mission trading post, Ingenious, wouldn't you say?"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482p 인용)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선교 사업의 소명과 인생을 함께 한 와그스태프(Wagstaff)는 담배와 기독교인의 삶 사이의 묘한 일치점을 설명한다. 그는 모든 가치보다 그리스도가 정해준 가치를 우위에 두고 있다. 노동이야 말로 악마로부터의 유혹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게으른 삶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독이라는 교활한 방법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생각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사고와 매우 유사한 일치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가 항상 타자의 사고보다 항상 우위에 있고 타자를 지속적으로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감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그들의 진짜 목적을 숨기는 허울뿐인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자기 기만적인 이 명분은 제국주의의 주체인 자신들마저도 분열을 일으키게 한다. 이 명분을 진실로 믿는 순진한 자와 이 명분의 허상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교활한 자로의 분열 말이다. 와그스태프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담배가 선교단 교역소(the Mission trading post)에서만 구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폴리네시안 사람들을 담배에 중독되게 하는 목적이 선교단의 부를 축적시키고 결국은 자국의 권력을 증가시키는 것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에 당당한 흡혈귀와 그렇지 못한 와그스태프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또한 지닌다. 그것은 인간만이 지니는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피 식민지인을 착취하는 제국주의는 태초에 그런 이기심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의 합의되어진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재탄생시키려는 진보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자연선택설(Natural Selection Theory)을 이론적 배경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라는 저서를 통해 모든 생물은 끊임없는 생존경쟁을 거쳐야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월한 종이 살아남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지구의 생명체들은 결국 육종(Sarcoma)과 비슷한 교배와 자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존에 적합한 모습으로 발전된 형태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다윈의 주장은 기존의 신 중심의 창조론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대치함으로서 인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또한 창조적인 그의 이론은 제국주의라는 인류의 잔혹한 범죄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아이러니(irony)적 상황을 연출시키고 말았다. 결국 다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이론이 오용되게 된 주된 이유는 지배 계층의 욕심 때문이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세 번째 이야기에서 식스스미스(Sixsmith)의 원자력에 대한 연구가 그리말디(Grimaldi)나 로이드 훅스(Lloyd Hooks)의 탐욕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추구가 용인될 수 있지만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 했듯이 그 욕망이 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넘어설 때는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리말디나 로이드 훅스 같이 많은 권력을 가진 지배 계층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 파급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국주의는 사회나 국가를 넘어서는 일찍이 경험하는 못한 엄청난 규모의 욕망의 주체가 저지른 비극이라 할 수 있다.

 

3. 해체되는 진리

일반적으로 진리라는 것은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인 일종의 보물로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되어져 왔다. 그래서 그런 진리에 대한 도전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 대한 원천적인 부정으로서 간주되어졌고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상반되는 진리의 공존, 혹은 진리의 상대성이 용인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종교적 담론의 붕괴와 같은 낡은 정신적 체계의 붕괴와 더불어 자연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도 크게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움직이는 물체 안에서는 동시인 것이 그것을 밖에서 보면 동시가 아닌 것을 밝힌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특수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은 이런 경우의 예로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존재로 모든 공간에서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시간이라는 개념도 결국 상대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그의 이론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자연 과학적인 표현인 것이다.(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1부 빛과 시간 특수상대성 이론 참조)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논리를 빌리자면 이 세계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모순적 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미첼도 그의 소설에서 이런 점을 그만의 방식으로 다시 묘사하고 있다.

 

But ... Union? Are you saying even Union was fictioned for your script?

No. Union prexists me, but its raison-d'être are not to foment revolution. Firstly, it attracts social malcontents like Xi-Li and keeps them where Unanimity can watch them. Secondly, it provides Nea So Copros with enemy required by any hierarchical state for social cohesion.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348p 인용)

 

위의 손미(Sonmi~451)의 대답으로 우리는 만장일치제(Unanimity)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적인 유니언(Union)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논리는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 이름이 나타내고 있듯이 만장일치제는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변증법(Dialectic)을 추구하는 민주적인 정치 집단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서있는 단 하나의 담론만을 인정하는 독재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리(Xi-Li)와 같은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굳이 국가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유니언 같은 또 다른 반국가적인 단체는 언제나 다시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장일치제가 고의로 유니언을 만드는 것이 또 다른 그것과 같은 단체의 발생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니언이 네아 소 코프로스의 필요한 적이 되는 것이 사회 응집력을 위해 필요하다는 대목에 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 비평가 이택광은 좌파의 가장 큰 적은 좌파라고 말했다.(아트앤스터디 (http://www.artnstudy.com/) 문화비평의 페다고지 참조) 이는 좌파 혹은 우파 어느 한쪽을 겨냥한 말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 제기로서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를 말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Sloosha's Crossin' An' Ev'rythin' After)에서 자크리는 프레션트(Prescients)족 메로님을 집요하게 의심한다. 사실 메로님을 프레션트 족의 교활한 첩자로 믿는 자크리의 의심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반쯤은 맞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믿는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메로님을 따르게 된다. 결국 모든 결과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크리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 내부에서 생겨난 의심을 관리하고 냉정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마침내 의심이라는 마음이 자크리 그 자신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의심과 믿음 중의 양자택일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크리가 마우나 케아(Mauna Kea)에서 더욱더 극한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어버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만장일치제도 이런 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이택광의 위의 말은 이런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상대가 극악무도하고 탐욕적인 사람일지라도 자신은 더욱더 이성적인 모습으로 그를 상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에 의해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면 자신은 그 상대방과 닮아가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더욱더 상대방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4. 반복이라는 것이 지니는 무거움

무표정한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과 직관적으로 소통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한다. 반면에 어른들은 점점 세상을 무감각하게 바라볼 가능성을 지니는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그들에게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으로 다가온다. 또한 그들은 용기가 부족한 자들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놀람을 주지 못하는 낡은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그 낯익은 세상에 안주해버리고 마는 비겁한 자들이다.(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텍스트 해석 연구소, 2007) 178p~188p 참조) 그러나 만약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점점 고정되어가는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시도를 감행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배후를 생각지 않는 아이와 무표정한 어른과는 또 다른 무언가의 긍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데이비드 미첼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클라우드 아틀라스 내의 한 단락인 제델헴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Zedelghem)와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The Ghastly Ordeal Of Timothy Cavendish)에서 풀어놓고 있다.

 

Will never write anything one-hundredth as good. Wish I were being immodest, but I'm not. Cloud Atlas Sextet holds my life, is my life, now I'm a spent firework; but at least I've been a firework.

People are obscenities. Would rather be music than be a mass of tubes squeezing semisolids around itself for a few decades before becoming so dribblesome it'll no longer function.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470p 인용)

 

로버트 프로비셔(Robert Frobisher)는 자신의 직업인 예술가의 사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예술가는 일반 대중들이 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이는 당대의 보편성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예술가로서의 생명력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인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프로비셔는 자살을 선택하고야 만다. 그는 자살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 있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를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단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프로비셔는 숨기고 있다. 그는 자신도 에어스(Ayrs)처럼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는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재능을 한 방울 한 방울씩 짜내다가 이제는 그 재능을 다 써먹어 프로비셔의 재능에 빌붙어 예술가의 삶을 연명하는 에어스 말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 작업에 마지막 혼신의 힘을 불어넣었고 더 이상 자신에게서 이를 능가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는 작품을 만들고야 만다. 이런 프로비셔의 비겁한 확고함은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에 나오는 캐번디시(Cavendish)의 유연함과 비교된다.

캐번디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덫에 갇힌 불쌍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이의 불행에 의해 발생된 것일지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결국 호긴스(Hoggins)의 불행은 그에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행운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생일대의 행운도 결국 허상과 같은 삶의 종말로 흐르는 좀 더 날카로운 덫이었을 뿐이었다. 어슐러(Ursula)와 풋풋한 사랑을 나누었던 사십년 전의 캐번디시는 그 후 사십년 동안 천천히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때의 그녀와 함께 있었던 나날들의 자신으로 돌아갈 것을 어렴풋이 꿈꾸지만 그것이 머릿속에 나타나기도 무섭게 포기해버린다. 어슐러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이미 변해버린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자신의 내면도 변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는 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로라 하우스(Aurora House)로부터의 극적인 탈출 후의 캐번디시는 전혀 다른 자로 환생하였다. 그는 이제 나이보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외침으로써 긍정의 화신이 된 자신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Like Solzhenitsyn laboring in Vermont, I shall beaver away in exile, far from the city that knitted my bones."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387p 인용) 살아있어도 죽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오로라 하우스에서의 극한 경험은 사십년 동안의 부패를 되돌리게 만들고 방금 전까지의 과거에 존재했던 캐번디시와는 전혀 다른 이가 탄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캐번디시는 또한 깨달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가 만약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불가사의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개인이 집단에 비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런던에서의 캐번디시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집단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개인이 될 때까지 열심히 준비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외친다. 그렇게 그는 다시 찾은 긍정을 표출하고 있다.

 

5. 결론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애덤 어윙의 태평양 일지(The Pacific Journal Of Adam Ewing)의 주인공 애덤 어윙은 이야기 마지막에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Yet what is any ocean but a multitude of drops?"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509p 인용) 그는 이 말을 통해서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을지라도 하나하나의 개인들이 조금씩 바뀌어간다면 결국엔 세상도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결론은 순수하다는 것을 넘어 순진하다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캐번디시가 인정한 대로 개인이란 집단에 끌려 다니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이란 그 시대가 저지르는 범죄의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그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행위를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품을 소비하고, 자동차 같은 기계를 운전하거나 이용해야만 한다. 결국 이런 행위는 쓰레기 매립이라는 토지오염 문제와 초미세 먼지와 같은 대기환경 오염의 문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우리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칭한다. 결코 개인이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이 같은 문제를 풀기위해서 수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졌지만 인류는 결코 완벽한 이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인류는 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이론들의 실천 주체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소홀히 평가하여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단 구조가 만들어지면 그 구성원들은 그것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끌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비평사조에서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포스트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로 이어진지 반세기 정도가 흘렀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아직도 이런 구조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인류의 현재 모습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한국 현대 사회도 역시 이런 흐름에서 전혀 동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 지표를 통해 알 수 있다.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계층의 고정화가 더욱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전 같은 성공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이는 물론 과거의 고도성장 시기의 거품이 거치고 사회가 안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반증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안정이라는 단어가 고착이라는 말과도 맞닿아 있고 동시에 악화되는 양극화에 좌절하는 개인들의 생성과도 맞닿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것을 문제 제기하지 않고 고치려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손미~451의 오리즌(An Orison Of Sonmi~451)에서 나오는 순혈 인간(pure blood)과 패브리컨트(fabricant)로 완전히 분리되는 계층 구조를 가지는 사회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애덤 어윙이 말하는 바다에서 작은 물방울 같은 개인의 문제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일지라도 다시 그 인간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굳건한 구조에 비해 위축된 개인의 자신감을 다시 회복해주어야 할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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