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 Two : The Heteroglot Novel (요약)

7.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의적 소설 : 의식의 다양성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의적 소설의 창시자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소설 장르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에서 영웅은 보통 소설에서와 같이 작가의 목소리와 같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인물의 말과 세계(A character's word about himself and his world)도 작가의 것만큼 중요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작가의 특성 중 하나로서 객관적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고 또한 작가를 위한 대변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구조에서 놀라운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플롯의 층에서 인물들을 작가의 계획에서 고정된 요소로 되게 하는 혹은 완결된 이미지로 결합시키는 간섭적인 연결(ordinary pragmatic link)이 부족하다. 그의 소설에서 그런 연결은 부차적인 역할과 특이하고 드문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서술의 지향은 단성적인(monologic) 소설과 매우 다르다. 말해지는 이야기, 만들어진 묘사, 제공 되어진 정보로부터의 위치는 새로운 세계, 즉 객체가 아닌 자주적인 주체의 세계에 맞는 새로운 방법으로 지향되어져야 한다. 그는 그런 지향을 통해 다성적 세계를 구성하고 단성적인 유럽 소설의 확립된 형태를 파괴했다.

그 지향에 대한 가장 믿음직한 토양은 러시아에서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거의 비극적으로 시작되었고 점진적인 자본주의의 침해를 받지 않아 다양한 세계와 사회적 집단이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러시아에서 발전하는 사회적 삶의 모순적 특성은 단성적인 의식의 뼈대에 맞지 않고 이 세계의 개인적 인격은 아주 생생함을 띄게 되었다. 이런 객관적 전제 조건들은 다의적인 소설의 다층성과 다성성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자신의 시대의 모순적인 다층성에 참여하였다. 이 경험은 그에게 하나의 의식안의 생각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공존하는 넓고 발달된 모순들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창조적 시야의 중요한 특징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의 방식의 근본적인 범주는 전진이 아니라 공존과 상호작용이다. 그는 그의 세계를 주로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서 보고 상상한다. 모든 것을 공존하는 것으로 보고, 나란하고 동시적으로 인식하고 보여주려는 그의 완고한 욕구는 한 인물을 그의 다양한 자신과 대화를 시킴으로서 한 사람의 내적 모순과 내적 단계를 공간적으로 극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은 동일한 시간, 장소를 가능한 많은 사람, 주제로 집중시키려는 그의 욕구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또한 동적이고 빠름으로 이끌어진다. 그래서 그는 시간의 승리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승리를 성취하였다.

물론 지금 제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은 말의 일반적인 감각에서 그의 세계관의 특성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그의 예술적 인식의 특성이다. 그는 작품에서 공존이라는 범주만으로 세계를 보고 대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특성은 그의 추상적 세계관에서도 필수적으로 반영된다. 그는 끊임없이 환경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에 대항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모든 사회·정치적 문제를 현재의 평행선상에서 다룬다. 그의 이런 점은 기자로서의 위치에 아주 적합하였다. 결국 그의 하루 동안의 동시대 사회의 모순점들의 교차인 신문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예술적 시야의 특징에 의해 정확히 설명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공존과 상호작용으로 보는 놀라운 예술적 능력은 위대함과 동시에 취약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만든다. 많은 현실의 면들이 그의 예술적 시야의 장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능력이 극한 단계까지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일반인들의 인식 체계까지도 갖출 수 있게 하였다. 다른 이들이 한 가지 생각을 보는 곳에서 그는 두 가지의 생각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분기이다. 단순한 거 같았던 모든 것은 그의 세계에서 복잡해지고 이중적 구조가 되었다. 그는 모든 현상에서 심오한 모호함을 인식하게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순, 분기는 변증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발전하는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평면에 펼쳐진 어떤 것을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시각화하는 힘은 그 순간의 장소에서의 다양성을 그 자체로 나타내는 것에 고정된다.

단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목소리를 즉각적이고, 동시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별한 능력은 그에게 다의적인 소설을 창조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모순적이고 복잡한 시대 상황, 몰락한 지식인, 사회 방랑자로서의 그의 위치, 삶의 다층성에 대한 그의 참여도 다성적인 소설의 토양이 되어 주었다.

모든 안정적이고 객관적인 영웅의 자질은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 자의식의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인물의 자의식이 그의 현실의 한 요소로서, 그의 통합된 이미지의 단지 특징 중 하나로서 보일 때 현실의 모든 것은 자의식의 요소가 된다. 하지만 작가는 자기 자신, 즉 그의 배타적인 시야의 장을 유지하려한다. 작가는 그것을 영웅의 시야의 장으로 집어넣으려 한다. 반면 도스토예스프는 작가의 단단하고 완결시키는 정의를 영웅 그 자신의 자의식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서 작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완수한다. 영웅 자신의 현실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외적 세계와 모든 삶을 자기 인식의 과정으로 끌고 오게 되었다. 이제 모든 세계와 흡수된 영웅의 자의식에 따라 다른 의식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영웅의 이미지의 구성에서 예술적 우월로서의 자의식은 그것 자체로 예술적 세계의 단성적인 결합을 무너뜨리기 충분하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만이 영웅의 자의식의 강세는 객관화되고 작품 그 자체가 영웅과 작가 사이의 간격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영웅과 작가 사이의 긴밀한 선을 자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개인적 기록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완전히 객관적이고 작품 속의 영웅은 비교적 자유롭고 독립적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다성적인 소설에서 작가의 새로운 예술적 입장은 대화적인 것이다. 이 대화적인 입장은 영웅의 독립성, 내적 자유, 비종결성, 불확정성을 확정해준다. 대화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즉 창조 과정에서의 실제 현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대화는 문지방에서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은 열린 삶으로서 조직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인물에 대한 작가의 담론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즉 작가의 말을 듣고 대답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담론으로서 구성된다. 그런 구성은 전통적인 장치는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작가의 입장인 것이다. 인물은 작가의 말에 대한 소리 없는 대상이 아니다. 즉 대화적으로 그에게 말해진다. 바로 그 구성에 의하여 작가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인물과 대화한다. 오직 대화적 참여적 방향만이 담론으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 다른 이의 담론을 진지하게 취할 수 있고 다른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강렬한 의미론적 연결에서의 거리를 보존하는 것은 작가의 계획에 필수적이다. 이것은 인물의 표현에서 진정한 객관성을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의 독립성으로 말미암아 인물이 작품의 요소로서 존재하고, 전적으로 작가로부터 창조됐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물의 독립성은 작가의 계획의 한계 내에서만 존재하고 객관화된 영웅의 비자율성과 같이 창조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창조라는 것은 발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물질의 법칙만큼 그 자신의 특별한 법칙에 얽매여 있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그 대상과 대상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자유재량도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대상 그 자체가 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적 이미지도 그것이 나름의 예술적 논리와 생성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명될 수 없다. 작가는 그 자신을 이 체계에 종속시켜야만 한다.

 

단성적인 소설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까지 다룬 다성적인 소설에서의 작가의 새로운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톨스토이의 세 죽음(Three Deaths [1858])이다. 이 작품은 부유한 귀족 부인, 마부, 나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총체적으로 삶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최상의 것으로서 죽음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죽음이 이 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완전히 완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의 세 삶은 내적으로 봉합되어 있어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는 이야기의 구성과 주제적 결합에 필요한 외적 연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야기에서 병든 귀족 부인을 실어 나르는 마부 세료가(Seryoga)는 길가 역에 죽어가는 마부로부터 부츠를 벗긴다. 죽어가는 마부는 더 이상 부츠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 마부의 죽음 후에 그의 묘지에 쓸 십자가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세 삶의 죽음들은 외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외적으로 인접해 있지만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작가의 시야와 의식의 통합된 장에서 연합되고, 병치되고 의미화 된다. 세 삶과 죽음은 작가를 위해서만 서로를 비추는 것이다. 작가의 시야의 장이 인물의 시야의 장을 압도하는 것이다. 결국은 각각 인물의 삶과 죽음의 총체적 의미는 작가의 시야의 장에서만 나타난다. 결국 잉여적인 작가의 시야의 장은 완결적이고 단성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만약 세 죽음이 도스토예프스키 식, 즉 다성적인 형식으로 구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우선 그는 이 세 단면을 서로를 반추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각각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서로의 의식과 시야의 장에 반추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종결의 말을 가지지 않는 대화의 참여자, 조직자로서 행동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작가와 인물은 동등한 위치에 자리 잡을 것이다. 즉 말은 이중으로 발화될 것이고 위대한 대화의 울림이 들릴 것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세 죽음을 묘사한 적이 없지만 자의식이 인간 이미지의 주요한 것이고, 자주적인 의식의 상호작용이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의 세계에서는 죽음은 삶을 종결시키고 설명하는 어떤 것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는 영웅의 죽음을 묘사하지 않고 문지방에 있는 영웅의 삶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웅은 내적으로 종결되지 않은 채 머물 것이다. 이것이 다성적인 이야기의 전개 방법이다.

 

8. 소설적 이미지로서 대화적 개념

이 챕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바흐친은 예술작품의 단성성을 계몽주의 시대에서 시작한 이성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의 영웅은 그 자신과 그의 당면한 환경에 대한 담론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담론이다. 즉 그는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대변인인 것이다. ‘지하생활자도 이미 이데올로기 대표자이다. 그리고 영웅의 묘사의 대부분은 자의식으로 남는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담론은 고백적 담론과 합쳐진다. 결국 세계에 대한 진실은 인간성의 진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데뷔스킨(Devushkin)과 골랴드킨(Golyadkin)을 결정하는 자의식의 범주는 세계관에 대한 기본적 범주가 되었다. 결국 세계관의 가장 고귀한 원칙은 가장 구체적인 개인의 경험을 관장하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친밀한 경험들의, 개개인의 삶의 예술적 혼합이 이뤄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생각으로서 의미화 하는 수용력을 보존하면서 누군가의 다른 생각을 대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을 확정하거나 그것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보존한다. 그의 작품에서 이 생각은 예술적 묘사의 주제가 되고 그 스스로 그 생각의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식의 세계의 진정한 영역을 나타내고, 보고, 보이는 법을 알고 있다. 그 인식은 한 개인의 고립된 의식에 살 수 없고 그것이 다른 인식들과의 진정한 대화적 관계에 진입할 때만 형태를 취하고 발전하고 그것의 언어적 표현을 재생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보이는 것처럼 인식은 영원히 거주하는 권리를 가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심리 형성물이 아니다. 인식의 존재의 영역은 개인적 의식이 아니라 의식 사이에 대화적 교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식은 대화적으로 결합된 언어와 유사하다. 언어와 같이 인식도 다른 입장을 가진 목소리에 의해 듣게 되고 이해되고 대답되기를 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인식의 위대한 예술가이고 단성적인 인식을 거부하였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브(Raskolnikov)의 첫 번째 내적 독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폐쇄적인 의식 내에서 심리적인 진행이 아니다. 반대로 고독한 라스콜니코브의 의식은 다른 이의 목소리와의 투쟁의 장이 되었다. 최근의 일들이 그의 의식에서 반추되었고, 지금 없는 이들과 밀접한 대화의 형태를 취하였고 이 대화에서 그는 그의 생각을 분명히 하려 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브는 그의 생각의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는 신문 기사를 출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디에도 이 기사를 독백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에는 그것의 내용과 포피리(Porfiry)와의 강렬하고 끔찍한 대화에서 라스콜니코브의 기본 생각을 접하게 된다. 포피리는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도발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 내적인 대화적 설명은 끊임없이 라스콜니코브에게 말해지는 질문과 그의 대답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그때 라스콜니코브는 스스로 그 기사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리고 그는 포피리의 도발적인 질문과 논평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결국 라스콜니코브의 생각은 개인의 의식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의 상호 개인적인 지점에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생각의 이론적인 면은 대화의 참가자에 의해 취해진 삶에 대한 궁극적 입장과 불가분하게 연결된다.

대화의 과정에서 라스콜니코브의 생각은 다양한 측면, 뉘앙스, 가능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른 삶의 입장들을 가지는 다양한 관계로 들어간다. 그것이 단일 의식에 맞는 일원론적이고 종결된 자질을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모순적인 복잡성과 관념력의 살아있는 다양한 측면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이미지(an image of the idea)이다.

라스콜니코브의 그런 특성의 생각은 소냐(Sonya)와의 대화에서 또다시 드러난다. 그리고 라스콜니코브의 풍자적 이중인인 스비드리가일로브(Svidrigailov)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마침내 라스콜리코브의 생각은 소설 전체 도처에 삶의 다양한 징후와 연결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징후들에 의해 검사받고, 입증되고, 확인받고, 거부되었다.

예술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철학자나 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을 만들었다. 그는 관념력으로서 삶을 꿰뚫는 인식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는 그의 시대를 위대한 대화로서 듣는, 개개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들 가운데의 대화적 관계를 발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크고 군림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약하고 완전히 나타나지 않은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총체로서의 현실은 즉각적으로 가까운 것에 의해 규명되지 않는다. 이 현실의 압도적인 부분은 아직 잠재해 있고 말해지지 않은 언어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지금 주어진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 사이에 벌어진 투쟁으로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어진 생각이 변화하는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이행할건지, 어떤 방향을 취할 건지를 자주 예측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생각을 대화적으로 교차하는 의식의 경계선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서로 소원하고 무지한 생각과 세계관을 묶고, 멀찍이 분리된 생각들을 확장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생각들 사이의 미래 대화적 접촉에 예견했다.

사상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의 생각들은 예술적 이미지로 변모하였다. 그것들은 불가분의 사람들의 이미지의 결합으로 합쳐졌고 단성적인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히 대화적으로 되었고 다른 이미지 용어들과 동등한 것으로 들어왔다. 또한 그것들은 작가 생각을 종결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죄와 벌같은 단성성의 예외도 존재하지만 결국 예술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승리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형성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데올로기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세계를 보고 묘사하는 원칙으로서 작용하고 작품 내에서의 추상적 인지와 생각의 기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형성적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요인이 부족하다. 분리된 생각과 생각의 체계가 생기게 하는 대상의 통합된 세계이다. 보통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에서는 그것들 스스로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말하는 분리된 생각, 주장, 제안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세계에 동조하지 않는 자의 생각은 참고적 질서의 조직적인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 통합 안에서 생각은 생각과 연결되고 생각은 다른 참고적 기반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은 전체로 이르는 체계 쪽으로 끌리게 되고 체계는 분리된 생각 밖으로 합쳐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면에서 분리된 생각도 체계적 통합에도 관련이 없다. 그에게 극히 불가분한 통합은 분리되고 한계가 있는 생각이나 제안, 주장이 아니라 관점의 필수적인 면이고 인간성의 필수적인 지점이다. 그의 모든 생각 안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총체적으로 인간성이 주어진다. 그래서 생각의 연결은 필수적인 지점의 연결이고 인간성의 연결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생각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관점, 의식, 목소리 안에서 생각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표현되고 들리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생각을 인식하고 만들려고 했다. 응결된 형태에서 생각은 시종일관 그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전체의 정신적 지향을 압축하는 생각만이 그에게 예술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에겐 두 가지의 생각은 이미 두 사람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 생각은 없고 모든 생각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by 그루브21 2014. 12. 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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