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Bakhtin, Marxism and Russian Populism (요약)

바흐친을 맑스주의자로 보거나 혹은 그의 작품을 근본적으로 반 맑시즘적으로 보는 여러 경쟁적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수의 석학들은 그의 작품을 맑시즘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바흐친을 종교적·신학적 사상가로 보려는 러시아 해석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바흐친의 방법론은 루카치, 벤야민, 그람시 같은 맑시즘 이론가들과 의미 있는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동시대 맑스주의자와 분리되는 독특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계급 분화도 인정하지 않는 범주로서 사람들의 활력을 기초로 하는, 지배적 헤게모니의 약화를 목표로 하는 대중문화를 수호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론은 맑스와 엥겔스의 영향에 형성된 러시아 포퓰리즘의 전통으로부터 생겨났다. 따라서 바흐친의 작품은 정통적 맑시즘은 아니지만 맑시즘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맑시즘 이론에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바흐친은 러시아 포퓰리즘의 전통에서 독일 관념론을 이해했다. 물론 그가 포퓰리즘에 정통했다는 문서적 증거는 거의 없지만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흐친은 맑스주의의 선택적인 결합이었던 러시아 사회학의 오랜 전통으로 돌아갔다.

 

맑시즘과 포퓰리즘

러시아 포퓰림즘의 가장 유명한 맑시즘의 정의는 1897년 레닌에 의해 나로드니키주의라는 이름으로 주어졌다. 그것의 개요를 말한다면 첫째,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는 퇴락을 말한다. 둘째, 농민협동조합 같은 러시아 경제 체계의 예외적인 특징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셋째, 지식인과 정치적 조직 사이의 연결과 다른 이에 대한 사회 계급의 물질적 이익에 대한 묵살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 포퓰리즘이 자본주의를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의 꿈을 가지고 농업적 개혁을 지닌 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포퓰리스트들은 러시아 내의 자본주의의 발달뿐만 아니라 서구에서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발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들의 서구 자본주의의 이미지의 형성의 주된 요인은 맑시즘이었고 특히 1867년에 출간된 자본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맑스의 자본론 덕분에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첫 번째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완벽한 포퓰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의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포퓰리스트의 의견을 맑스가 참조함으로서 그들의 교류는 대화적 만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후에 포퓰리스트와 러시아 맑시즘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난 기계적인 접근은 스탈린 시대에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맑스의 사상을 제대로 계승한 자들은 러시아 맑시즘이 아니라 포퓰리스트였다.

포퓰리스트에게 소작농의 공동체는 맑스가 부르는 원시 공산주의의 유물을 대변한다. 이것은 파괴적인 자본의 개입을 막고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포퓰리스트는 주장한다. 1870년대에 맑스와 엥겔스의 인류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욕구와 원시사회의 민주성에 대한 집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입장은 러시아 혁명가 베라 자술리히와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 편지에서 맑스는 러시아 포퓰리즘의 기본 입장을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러시아의 역사적 조건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런 언급은 1924년까지 어디에도 출판되지 않았고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지만 트로츠키의 이론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논거한대로 맑시즘은 러시아 포퓰리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한 주요 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 포퓰리즘은 맑시즘의 역사의 중요한 장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주관적 사회학

1934년경에 소설가는 대중적 개념의 체계자로서, 레닌에 의해 묘사된 포퓰리즘의 세 번째 특징을 순응하는 위치로서 드러난다. 레닌은 라브로프와 미카일로브스키에 의해 발전된 포퓰리스트의 주관적 사회학을 언급했다. 이것은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이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위해 헤겔로부터 차용한 역사적 필연성의 법칙과 대치되어 발전했다. 일찍이 1856년에 라브로프는 헤겔적 범주를 물질세계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러시아의 경향을 규탄했다.

논리적 필연과 구별되는 주관적 사회학은 사회 변화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한다. 그것은 세 가지 주장을 지니고 있다. 첫째, 도덕적 가치는 사실로부터 제거되거나 끌어낼 수 없다. 둘째, 사회 과학은 객관화될 수 없지만 언제나 정서적, 이데올로기적 요인을 수반한다. 셋째, 인간의 생각과 의지는 발전의 법칙에 대항하고 결정적으로 역사적 과정을 형성한다.

주관적 사회학이 생철학과 신칸트 윤리학의 측면에서 서술되어져도 바흐친의 초기 저작에서는 발전의 논리의 수동적인 수용에 대항하는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주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맑시즘에 대한 유일한 직접적인 논평으로서 바흐친은 역사적 유물론의 힘과 매력은 결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역사적이고, 실질적 행위를 위한 장소에 놓이지만 주어진 것과 계획된 것 사이의 구별을 실패해 방법론적 죄악을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또한 각각의 사건은 역사로서 고려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상이 명확한 사회적 이상에 따라 선택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라브로프가 제시한 것처럼, 목적의식이 있는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여러 활동을 분류할 수 있는 중심적 실타래를 제공한다. 즉 역사의 창조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은 그의 특정한 이해를 보다 넓은 사회적 이해와 융합해야만 한다.

라브로프의 이론은 포퓰리즘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서구화된 진영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에서 더욱 사회학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관습의 무의식적 연대에서 해방된 개인의 의식적 연대로의 사회적 발전의 경제적 측면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개인의 출현과 연결된 역사적 세계의 탄생에 대한 그의 설명은 바흐친의 후기 관점과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흐친과 같이 라브로프도 윤리 철학에 대한 신칸트 학파의 주장을 유지하면서 헤겔적 역사주의를 취했다.

미카일로브스키는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의 당위성을 회고적 이상주의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원시 사회는 사회적 분화, 특수화, 종속 없이 단순한 협동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발달된 사회의 핵심은 노동의 분할이다. 이 분할은 인간성과 세계관의 분열을 가져온다. 그러나 역사가 인간을 파편화시켰지만 인간은 아직도 하나의 전체이고 생각은 분해될 수 없는 끈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 안에서 그는 원시 사회의 공동체 의식에 이 시대에 필요한 진보적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

바로 이 생각이 바흐친의 문화에 대한, 특히 그의 카니발 이론의 중심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미카일로브스키의 주장이 광범위하게 자본론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먼저 주목해야한다. 또한 자본론은 지멜의 신칸트학파에 대한 해석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는 자본론을 통해서 대중들이 어떻게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 노동 시장으로 던져지는 지를 발견했다. 공동 소유의 잔재들은 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보존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바흐친과 포퓰리스트

바흐친에게 신칸트 철학의 영향을 받게 한 인물은 그의 친구 카간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라브로프와 미카일로브스키를 통해서 신칸트 윤리학과 러시아 포퓰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이끌어 내는데 일조했다. 바흐친이 그의 저작 활동을 하기 전부터 이 두 지적 흐름의 융합을 위한 전제들은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퓰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신칸트학파는 헤겔의 변증법적 일원론을 칸트의 자유의 윤리학으로 대치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암시는 사뭇 달랐다. 독일에서와 달리 러시아에서의 신칸트 윤리학은 포퓰리스트와 소작농들의 동맹을 통해서 파멸적 자본주의에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1961년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에서 바흐친도 명백히 포퓰리스트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에 의해 극단에 다다른 인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 조짐은 1929년부터 나타났었다. 그때 그는 주관적 사회학의 방법론을 명백히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제시하고 있다. 위대한 소설가는 통합되지 않은 다수의 의식을 제시하면서 나타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칭점으로 톨스토이와 헤겔을 발견했다. 바흐친은 개인을 전체의 조각으로서 식별하는 시도에 대항하여 진실하고, 완전히 정당한 'I'를 옹호했다.

바흐친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발전의 사회학적인 전제 조건을 논할 때, 그는 그 조건이 러시아의 상황 아주 잘 맞는 것을 주목하였다. 서구에 비해 자본주의의 점진적 침식을 겪지 않은 러시아는 개인성과 사회성이 훼손되지 않았고 결국 다성적 소설을 위한 객관적 전제 조건들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역사의 해석과 다성적 소설의 의미는 포퓰리즘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의 진실한 개인성은 자본주의의 비극적 논리에 저항하는 원천인 것이다.

바흐친이 독백, 작가적 담론, 시학을 일컫는 것은 미카일로브스키에 의해 설명된 사회의 발전에서의 개인의 동질화의 과정과 유사하다. 그에게 소쉬르의 랑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문학 경전은 개인을 사회적 파편으로 만드는, 개인적 발화를 추상적 사회 언어로 돌리는 구심적 힘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정적인 문화의 형태는, 개인들에게 의문을 품을 수 없는 권위를 행사하는 카시러가 말하는 신화적인 것이다. 바흐친도 이런 카시러의 입장을 취하고 포퓰리스트의 논리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였다. 사람은 자연에 다시 흡수되지 않지만, 사회 유기체에는 흡수될 수 있다. 개인적 언어는 사회적 언어로 합병되어진다. 랑그의 빠롤처럼 말이다.

권위적 힘을 분산시키는 내적·설득적 담론은 라브로프의 해방된 개인의 의식적 연대의 언어적 필연적 결과이다. 즉 비판적으로 선택된 담론은 독립적·이데올로기적 삶을 격려하는 자신과 뒤섞여 있다. 바흐친도 라브로프와 같이 그런 사회성의 다양화를 지지하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계층화된 언어, 이종어는 드러나게 되었고, 세계는 주관적 사회학에 따르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적인 원칙의 진정한 사회 이상과 만나게 되었다. 바흐친이 대화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 사회학의 새로운 형태인 것이다.

 

카니발과 사회적 유기체의 부정

전통적 포퓰리스트의 정의는 바흐친의 이론인 카니발의 기능과 일치한다. 카니발에서 사회적 역할의 고정성은 사라진다. 잠시 동안 사회의 모든 구조는 전복되고 뒤집어 진다. 다시 원시 사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카니발의 군중은 미카일로브스키의 단순한 협조라는 그의 이론과 닮았다. 개인들은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초월하고 사회적 집단은 육체적으로 균질해지는 것이다. 만찬, 연회, 죽음 그리고 탄생은 미카일로브스키가 윤곽을 그린 회고적 유토피아의 상징적 구조와 일맥상통한다. 카니발의 한정적 시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 공동체의 섬들은 현대 사회 질서의 상정에 대한 깊은 비판적 토대를 제공한다.

라브로프는 단순한 협조를 토대로 사회·문화적 영역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정치적 당을 만들기를 원했다. 반면 바흐친은 그런 비평적 가능성의 생성은 종속된 개인을 체계화하고 설명하는 소설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개인들은 진정한 특성과 다의성을 다시 얻게 된다. 포퓰리스트의 정치적 지도자가 대중을 강한 정치적 힘으로 구성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대중적 회의론을 비평적 문화 광장으로 구성하는 구조로 조각한다.

카니발 이론이 니체의 디오니소스부터 신칸트학파, 생철학까지 다양한 원천을 가지고 있지만 포퓰리즘과의 결속이 가장 분명히 존재한다. 바흐친의 포퓰리즘의 수용과 독일 관념론의 이해는 그가 고대와 농촌 사회주의 사이에서 끌어온 시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바흐친은 이상적·고전적 예술 형태를 혁명적 문화로 기획하려는 민주적 지식인과 유사성을 띈다. 예를 들면 와그너의 보수적·심미적 예술 작품을 맑스와 엥겔스의 원시 사회의 이론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와그너에 의해 새로워진 고대 세계의 이미지는 맑스에 의해 취해지고 다시 러시아 이론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외적인 것이 공공적 특징을 획득한다는 그의 설명에 의해 고대 그리스 광장은 모든 것이 외면화된 곳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바흐친 문학론의 주인공, 라블레, 괴테,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에서 새롭고 완전히 외면화된 인물을 창조하려는 이들이 되었다. 마침내 소설에서 세상의 분열은 극복되어졌다. 그러나 예술과 삶의 분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결론

바흐친의 저작은 러시아의 환경과 전통에 의해 형성된 절충주의의 산물이다. 러시아 지식인으로서 그는 독일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배웠고 그것들을 당대 사회 문화적 쟁점들에 조화시켰다. 그런 신칸트학파와 생철학의 영향을 받은 바흐친의 초기 저작은 19세기 중반 윤리 철학적인 러시아 포퓰리즘을 연상케 한다. 반면 그의 후기 저작은 포퓰리스트의 사회 정치적 경향과 유사함을 띈다. 바흐친을 정치에는 무관심한 철학적 포퓰리스트로 보는 해설가는 1870년대의 러시아 포퓰리스트이 자신들을 비정치적이라고 칭하는 것을 잘못 인지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형태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 중요한 것은 정치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라고 생각했다.

바흐친은 주관적 사회학과 관념 철학의 범주에 너무 긴밀히 연결되어졌다. 그러나 산만한 상호작용 속에서 현상학적 측면에 집중함으로서 그는 더욱더 헤게모니의 의미론적 측면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 분석을 문학의 장르와 역사에 적용시킴으로서 어떠한 사회·정치적 반대보다 문학 분석의 방법론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가 언어의 집중화 같은 윤리적 문제로 처리한 많은 현상들은 사실 정치적 문제 제기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적 계층화는 단지 의식의 다변화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결정소를 가지는 것이다. 한편 몇몇 경우에서의 바흐친의 분석은 맑시즘의 원칙에 따라 수정되는 것이 필요하다. 맑시즘과 바흐친 철학의 상호작용의 과정은 역사적 유물론과 그것이 창조한 포퓰리즘 사이의 경우처럼 대화적이어야 한다.

 

by 그루브21 2014. 12. 8. 17:42

15. Aesthetic Visualizing of Time/Space: The Chronotope (요약)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서사시는 절대적인 과거를 묘사하는 세계의 이동을 특징으로 갖는 완성되고 종결된 포괄적인 형식이다. 서사적 세계의 관점에서 시작’, ‘처음’, ‘창립자’, ‘조상’, ‘일찍이 일어난 것등은 단지 시간의 범주가 아니라 극한 단계까지 안정된 시간의 범주이다. 진정한 선함은 과거에만 일어난다. 서사시의 절대적 과거는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한 유일한 원천이고 모든 선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서사적 과거는 상대성, 즉 점진적인 현재와 연결될 수 있는 시간적 과정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경계선에 의해 모든 차후의 시간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계선을 파괴하는 것은 장르로서의 서사시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공간에는 우리가 미래를 엿볼 구멍을 찾을 엄두를 내기조차 힘든 확정성과 닫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특성의 서사시의 과거는 국가적 전통의 형식에서만 보존되고 나타나진다. 서사시는 전적으로 전통에 의존한다. 서사시의 담론은 전통에 의해 물려받은 담론인 것이다. 그 때문에 절대적 과거의 서사시의 세계는 개인적 경험으로 접근할 수 없고, 개인적 관점 혹은 평가를 허락되지 않는 전통적이고 성스러운 것이 되었다.

이런 관여될 수 없는 장르에서의 개인은 완결된 존재이다. 그러나 완벽하다는 것은 가망 없이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그 자신과 일치를 이루고 완벽히 자신을 표면화시킨다. 그의 진정한 본질과 그의 외적 징후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서사적 거리감의 파괴와 관여될 수 없는 면에서 현재의 비결정적인 사건의 구역으로의 개인 이미지의 이동이 이루어진다면 소설과 모든 문학에서 개인 이미지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민속 문화와 소설에 대한 대중-희극적 원천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웃음은 서사시의 거리감을 파괴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자유롭고 친숙하게 조사하였고 또 그를 뒤집었고, 표면과 중심 사이, 가능성과 실제 사이의 차이를 노출시켰다. 인물은 더 이상 그 자신과 일치시키는 것을 그만두었고 또한 구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우리는 문학에서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의 관계의 본질적인 결합을 크로노토프(chronotope)라고 부를 것이다. 이 용어는 원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때문에 소개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용어를 은유적으로 차용할 뿐이지 큰 연관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용어가 공간과 시간의 불가분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로노토프에서 공간적, 시간적 지표는 하나의 구체적인 전체로 융합된다. 시간은 짙어지고, 예술적인 시각을 획득한다. 그리고 공간은 시간, 구성, 역사에 반응하게 된다. 이런 상호 교차가 크로노토프를 특징짓는다.

문학에서 크로노토프는 본질적인 포괄적 중요성을 갖는다. 장르와 포괄적 구별을 결정짓는 것은 크로노토프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형식적 구성 범주인 크로노토프는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미지도 결정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시간과 공간을 예술적으로 고정시키는 방법들을 가진 세 가지 소설적 유형이 발달되었다. 다시 말해서 세 가지 소설적 크로노토프가 있었다. 이것들은 매우 생산적이고 유연했고 18세기 중반까지 모험 소설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i) 그리스 로맨스 : 시련의 모험 소설

갑자기바로 그 순간에라는 말은 이 시대의 유형을 특징짓는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고유의 특정한 논리를 가지는 순전한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무작위의 만일의 사태이다. 즉 시간에서 무작위적 괴리의 논리이다.

시간의 이런 유형에서는 개인은 단지 완전히 수동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주성을 빼앗긴 개인인 것이다. 그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공간적인 종류가 될 것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리스 로맨스에서의 모든 인물의 행동은 공간(탈출, 박해, 탐색)을 통한 강요된 움직임에 환원되었다. 결국 인간의 공간을 통한 움직임은 그리스 로맨스의 크로노토프에 대한 기본적 색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맨스에서의 인물은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유지한 채 운명이 정해준 것을 견딘다. 인간 정체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 암시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 로맨스는 계급의식을 선행하는 민속 문화와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가진다. 그리스 로맨스에서 아무리 인간의 정체성이 빈곤하게 될지라도 그것 안에는 민속적 인류의 귀중한 알맹이가 보존되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비인간적인 힘 사이의 투쟁에서 파괴될 수 없는 인간의 힘에 대한 믿음을 언제나 느끼고 있다.

 

ii) 일상생활의 모험 소설

인간의 민속적 이미지는 변형과 정체성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결합은 대중 민간설화에서 매우 명료하게 보인다.

변형은 위기의 매우 중요한 순간에서 개인의 삶의 전부를 묘사하는 방법을 위한 토대로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의 과정에서의 다양한 시대와 단계로서 그 안에 통합되는 이미지를 제공받는다. 우리가 얻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위기와 재탄생이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그리스 로맨스의 플롯과 아풀레이안(Apuleian) 플롯이 구별되는 것이다. 아풀레이우스가 묘사하는 사건은 주인공의 삶을 결정한다. 물론 전체로서의 전기적 삶이 아니라 몇몇 위기의 순간 묘사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의 삶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자주성은 주인공 그 자신과 그 고유의 인간성에 속하게 된다. 주인공이 겪는 연속적인 모험은 그의 정체성의 단순한 확인을 야기하지 않고 정화되고 재탄생된 주인공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개인의 삶의 과정을 그의 실제적 공간의 과정, 길과 융합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길 그 자체는 친숙한 지역을 통해 확장되었고 마침내 장르의 역사성 안에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는 독특한 소설적 크로노토프가 생성되었다. 그것의 중심은 민속 문화이다. 민속에서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삶의 길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iii) 고대 전기문학과 자서전

자서전, 전기문학의 고전적인 형식은 문학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행동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반대로 그런 형식은 시민적, 정치적 행동 혹은 공공성을 부여하는 인간성에 대한 칭찬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크로노토프라기 보다는 외적인 크로노토프이다. 이 진정한 삶의 크로노토프에서 삶과 인간 이미지의 한계는 그것의 특수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진정한 삶의 크로노토프는 공공 광장(the agora)에 의해 구성된다. 고대에서는 개인과 그의 삶의 자서전적, 전기문학적 자의식은 공공 광장에서 발가벗겨지고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광장은 어떤 상태를 구성하게 된다. 그것은 최고의 법정, 과학과 예술의 전체, 그것에 참여하는 전체 사람을 말한다. 그 안에서 가장 고상한 범주들이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보이게 되고, 공적인 시민의 승인의 도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시대에서 사람의 이미지는 안 들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왜곡되었다. 이제 그의 공공적 기원을 생산할 수 있는 통합과 총체를 잃게 되어 그의 자의식은 통합된 크로노토프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진실성을 잃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게 되었다.

크로노토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소설의 기본적인 서술에 대한 중심을 조직한다는 것이다. 크로노토프는 서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리는 장소인 것이다. 이제 크로노토프에 의해서 시간은 감지할 수 있고 보이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크로노토프는 소설에 형체를 부여하는 힘으로서 구체화하는 묘사를 위한 중심으로서 나타난다. 모든 소설의 추상적 요인, 즉 철학적 사회적 일반화, 생각, 원인과 결과에 대한 분석은 크로노토프에 끌리게 되고 예술의 상상하는 힘을 작동하게 만든다. 이것이 크로노토프의 묘사적 의의인 것이다.

 

16. The Serio-Comical Tradition of The Menippea (요약)

 

고대의 요소는 끊임없는 재생, 즉 현대화 덕분에 보존된다. 장르 안에서 언제나 낡고, 새로운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장르는 문학의 전개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갱신하게 된다. 장르는 현재를 살지만 언제나 그의 과거, 시작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르는 문학의 전개의 통합과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

소설적 장르는 세 가지 근본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서사시, 수사학, 카니발성이다. 특히 카니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지한척하는 희극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영역은 두 가지 장르로 나누어진다. 소크라테스(Socratic)식 대화법과 메니피안(Menippean) 풍자이다.

메니피안 풍자는 고대 기독교 문학과 비잔틴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것은 발전을 계속 지속해왔다. 그래서 메니피안 풍자는 문학에서 카니발 감각을 위한 주요한 경로가 되었다.

메니피아는 자유스런 플롯과 철학적 독창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의 주인공이 역사적·전설적 인물이라는 것은 어떤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는 메니피아보다 더 자유스러운 장르를 발견할 수 없다.

장르로서 메니피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환상과 모험의 대담한 사용이 내적으로 동기화되었고, 정당화되고,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목표에 헌신되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환상은 진리의 긍정적인 전형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유발하고, 무엇보다도 시험하는 방식으로서 작용한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놀라운 삶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때때로 환상은 모험 이야기의 특징을 채용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환상은 진리를 야기하고 시험하는 관념적 기능에 종속된다. 한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세계에서 그의 철학적 위치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니파아의 내용은 세계 내의 진리의 모험에 관한 것이다.

또 메니피아는 환상과 상징, 신비스런 종교적 요소를 극단적인 사실주의와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진리의 모험은 길, 사창가, 도둑 소굴, 여관, 시장, 감옥, 에로틱한 잔치 등의 장소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이미지는 극한 표현으로 세속적인 악마, 타락, 천함, 상스러움과 충돌하게 된다. 이런 메니피아의 대화성은 도스토예프스키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은 메니피아에서 독창성과 환상적인 요소의 대담성은 철학적 보편성과 가능한 넓은 범위로 세상을 보는 수용성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메니피아는 극단적인 질문의 장르이다. 그것에서 철학적 위치는 시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세, 종교 개혁의 시대를 통해 메니피아는 아래 세상에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르네상스의 유럽 문학에 널리 퍼진 죽은 이의 대화(dialogues of the dead)라는 특별한 장르가 생기는데 영향을 끼쳤다.

메니피아에서 실험적인 괴기함은 그것의 외형을 고대 서사시와 비극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괴기함은 삶의 관찰된 현상의 척도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라블레, 스위프트, 볼테르 등에 의해서 메니피아의 이런 특성이 계승되게 되었다.

메니피아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비정상적인 도덕적, 정신적 상태의 묘사가 나타내게 되었다. 이 현상은 단지 주제로서 좁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 백일몽, 정신 이상은 개인과 그의 운명의 서사시와 비극의 요소를 파괴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서 다른 누군가와 다른 삶의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의 종결된 자질을 버리는 것이다. 꿈은 서사시에도 흔하지만 그곳에서는 예언적이고 충고적인 기능을 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이다. 결국 총체와 종결된 자질의 파괴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적 관계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그리고 스캔들과 괴상함(scandals and eccentricities), 그리고 부적절한 말도 메니피아의 이런 특성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메니피아는 날카로운 대조와 모순적 결합으로 가득 차있다. 예를 들어 고결한 창녀, 노예가 되는 황제, 도덕적 몰락과 정화 같은 갑작스런 이행을 메니피아는 좋아한다.

그리고 메니피아는 자주 꿈 혹은 여행의 형태로 구현되는 사회적 유토피아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때때로 유토피아적 소설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 유토피아적 요소는 다른 모든 장르와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장르가 중간에 끼워지는 것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도 메니피아의 특징이다. 끼워지는 장르는 중편 소설, 편지, 웅변적 연설, 심포지엄 등을 말한다. 이 끼워짐의 과정에서 패러디와 객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끼워지는 장르의 존재에 의해서 메니피아의 다채로움은 또다시 강화된다. 여기서 합쳐지는 것은 말에 대한 새로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메니피아의 마지막 특징은 당면한 논쟁적인 핵심에 대한 관심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을 날카롭게 울리는 고대의 기자적인 장르인 것이다. 예를 들어 루시안의 풍자들(The satires of Lucian)은 공공연하고 숨겨진 철학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등의 논쟁들과 당시대 혹은 최근에 사망한 공적 인물들의 이미지로 가득 차있다. 그것들은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새로이 나타나는 사회 내의 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특징을 갖는 메니피아는 고결이라는 고대 이념을 구성하는 시대적 규범이 파괴되고, 수많은 이질적인 종교와 철학 내에서의 투쟁이 강렬해진 시대에서 형성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준비와 형성 과정의 시대에서 형성되었다. 바로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다른 면은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부합되어 역할을 수행하는 인간 삶의 외적인 위치를 평가 절하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스토아학파 철학자와 루시안(Lucian), 아푸레이우스(Apuleius)의 문학 작품의 영향이 컸다. 이것으로 인하여 인간과 그의 운명의 서사시와 비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래서 메니피아라는 장르는 그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그곳에서 삶의 내용은 내적 논리를 가지는 안정된 형식에 부어졌고, 더불어 그것의 모든 요소의 연결이 보장되어졌다. 이 때문에 메니피아는 유럽 소설의 역사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by 그루브21 2014. 12. 8. 13:21

Section Two : The Heteroglot Novel (요약)

7.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의적 소설 : 의식의 다양성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의적 소설의 창시자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소설 장르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에서 영웅은 보통 소설에서와 같이 작가의 목소리와 같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인물의 말과 세계(A character's word about himself and his world)도 작가의 것만큼 중요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작가의 특성 중 하나로서 객관적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고 또한 작가를 위한 대변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구조에서 놀라운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플롯의 층에서 인물들을 작가의 계획에서 고정된 요소로 되게 하는 혹은 완결된 이미지로 결합시키는 간섭적인 연결(ordinary pragmatic link)이 부족하다. 그의 소설에서 그런 연결은 부차적인 역할과 특이하고 드문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서술의 지향은 단성적인(monologic) 소설과 매우 다르다. 말해지는 이야기, 만들어진 묘사, 제공 되어진 정보로부터의 위치는 새로운 세계, 즉 객체가 아닌 자주적인 주체의 세계에 맞는 새로운 방법으로 지향되어져야 한다. 그는 그런 지향을 통해 다성적 세계를 구성하고 단성적인 유럽 소설의 확립된 형태를 파괴했다.

그 지향에 대한 가장 믿음직한 토양은 러시아에서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거의 비극적으로 시작되었고 점진적인 자본주의의 침해를 받지 않아 다양한 세계와 사회적 집단이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러시아에서 발전하는 사회적 삶의 모순적 특성은 단성적인 의식의 뼈대에 맞지 않고 이 세계의 개인적 인격은 아주 생생함을 띄게 되었다. 이런 객관적 전제 조건들은 다의적인 소설의 다층성과 다성성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자신의 시대의 모순적인 다층성에 참여하였다. 이 경험은 그에게 하나의 의식안의 생각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공존하는 넓고 발달된 모순들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창조적 시야의 중요한 특징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의 방식의 근본적인 범주는 전진이 아니라 공존과 상호작용이다. 그는 그의 세계를 주로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서 보고 상상한다. 모든 것을 공존하는 것으로 보고, 나란하고 동시적으로 인식하고 보여주려는 그의 완고한 욕구는 한 인물을 그의 다양한 자신과 대화를 시킴으로서 한 사람의 내적 모순과 내적 단계를 공간적으로 극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은 동일한 시간, 장소를 가능한 많은 사람, 주제로 집중시키려는 그의 욕구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또한 동적이고 빠름으로 이끌어진다. 그래서 그는 시간의 승리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승리를 성취하였다.

물론 지금 제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은 말의 일반적인 감각에서 그의 세계관의 특성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그의 예술적 인식의 특성이다. 그는 작품에서 공존이라는 범주만으로 세계를 보고 대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특성은 그의 추상적 세계관에서도 필수적으로 반영된다. 그는 끊임없이 환경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에 대항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모든 사회·정치적 문제를 현재의 평행선상에서 다룬다. 그의 이런 점은 기자로서의 위치에 아주 적합하였다. 결국 그의 하루 동안의 동시대 사회의 모순점들의 교차인 신문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예술적 시야의 특징에 의해 정확히 설명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공존과 상호작용으로 보는 놀라운 예술적 능력은 위대함과 동시에 취약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만든다. 많은 현실의 면들이 그의 예술적 시야의 장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능력이 극한 단계까지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일반인들의 인식 체계까지도 갖출 수 있게 하였다. 다른 이들이 한 가지 생각을 보는 곳에서 그는 두 가지의 생각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분기이다. 단순한 거 같았던 모든 것은 그의 세계에서 복잡해지고 이중적 구조가 되었다. 그는 모든 현상에서 심오한 모호함을 인식하게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순, 분기는 변증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발전하는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평면에 펼쳐진 어떤 것을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시각화하는 힘은 그 순간의 장소에서의 다양성을 그 자체로 나타내는 것에 고정된다.

단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목소리를 즉각적이고, 동시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별한 능력은 그에게 다의적인 소설을 창조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모순적이고 복잡한 시대 상황, 몰락한 지식인, 사회 방랑자로서의 그의 위치, 삶의 다층성에 대한 그의 참여도 다성적인 소설의 토양이 되어 주었다.

모든 안정적이고 객관적인 영웅의 자질은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 자의식의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인물의 자의식이 그의 현실의 한 요소로서, 그의 통합된 이미지의 단지 특징 중 하나로서 보일 때 현실의 모든 것은 자의식의 요소가 된다. 하지만 작가는 자기 자신, 즉 그의 배타적인 시야의 장을 유지하려한다. 작가는 그것을 영웅의 시야의 장으로 집어넣으려 한다. 반면 도스토예스프는 작가의 단단하고 완결시키는 정의를 영웅 그 자신의 자의식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서 작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완수한다. 영웅 자신의 현실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외적 세계와 모든 삶을 자기 인식의 과정으로 끌고 오게 되었다. 이제 모든 세계와 흡수된 영웅의 자의식에 따라 다른 의식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영웅의 이미지의 구성에서 예술적 우월로서의 자의식은 그것 자체로 예술적 세계의 단성적인 결합을 무너뜨리기 충분하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만이 영웅의 자의식의 강세는 객관화되고 작품 그 자체가 영웅과 작가 사이의 간격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영웅과 작가 사이의 긴밀한 선을 자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개인적 기록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완전히 객관적이고 작품 속의 영웅은 비교적 자유롭고 독립적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다성적인 소설에서 작가의 새로운 예술적 입장은 대화적인 것이다. 이 대화적인 입장은 영웅의 독립성, 내적 자유, 비종결성, 불확정성을 확정해준다. 대화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즉 창조 과정에서의 실제 현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대화는 문지방에서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은 열린 삶으로서 조직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인물에 대한 작가의 담론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즉 작가의 말을 듣고 대답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담론으로서 구성된다. 그런 구성은 전통적인 장치는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작가의 입장인 것이다. 인물은 작가의 말에 대한 소리 없는 대상이 아니다. 즉 대화적으로 그에게 말해진다. 바로 그 구성에 의하여 작가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인물과 대화한다. 오직 대화적 참여적 방향만이 담론으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 다른 이의 담론을 진지하게 취할 수 있고 다른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강렬한 의미론적 연결에서의 거리를 보존하는 것은 작가의 계획에 필수적이다. 이것은 인물의 표현에서 진정한 객관성을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의 독립성으로 말미암아 인물이 작품의 요소로서 존재하고, 전적으로 작가로부터 창조됐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물의 독립성은 작가의 계획의 한계 내에서만 존재하고 객관화된 영웅의 비자율성과 같이 창조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창조라는 것은 발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물질의 법칙만큼 그 자신의 특별한 법칙에 얽매여 있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그 대상과 대상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자유재량도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대상 그 자체가 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적 이미지도 그것이 나름의 예술적 논리와 생성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명될 수 없다. 작가는 그 자신을 이 체계에 종속시켜야만 한다.

 

단성적인 소설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까지 다룬 다성적인 소설에서의 작가의 새로운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톨스토이의 세 죽음(Three Deaths [1858])이다. 이 작품은 부유한 귀족 부인, 마부, 나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총체적으로 삶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최상의 것으로서 죽음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죽음이 이 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완전히 완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의 세 삶은 내적으로 봉합되어 있어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는 이야기의 구성과 주제적 결합에 필요한 외적 연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야기에서 병든 귀족 부인을 실어 나르는 마부 세료가(Seryoga)는 길가 역에 죽어가는 마부로부터 부츠를 벗긴다. 죽어가는 마부는 더 이상 부츠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 마부의 죽음 후에 그의 묘지에 쓸 십자가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세 삶의 죽음들은 외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외적으로 인접해 있지만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작가의 시야와 의식의 통합된 장에서 연합되고, 병치되고 의미화 된다. 세 삶과 죽음은 작가를 위해서만 서로를 비추는 것이다. 작가의 시야의 장이 인물의 시야의 장을 압도하는 것이다. 결국은 각각 인물의 삶과 죽음의 총체적 의미는 작가의 시야의 장에서만 나타난다. 결국 잉여적인 작가의 시야의 장은 완결적이고 단성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만약 세 죽음이 도스토예프스키 식, 즉 다성적인 형식으로 구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우선 그는 이 세 단면을 서로를 반추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각각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서로의 의식과 시야의 장에 반추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종결의 말을 가지지 않는 대화의 참여자, 조직자로서 행동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작가와 인물은 동등한 위치에 자리 잡을 것이다. 즉 말은 이중으로 발화될 것이고 위대한 대화의 울림이 들릴 것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세 죽음을 묘사한 적이 없지만 자의식이 인간 이미지의 주요한 것이고, 자주적인 의식의 상호작용이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의 세계에서는 죽음은 삶을 종결시키고 설명하는 어떤 것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는 영웅의 죽음을 묘사하지 않고 문지방에 있는 영웅의 삶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웅은 내적으로 종결되지 않은 채 머물 것이다. 이것이 다성적인 이야기의 전개 방법이다.

 

8. 소설적 이미지로서 대화적 개념

이 챕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바흐친은 예술작품의 단성성을 계몽주의 시대에서 시작한 이성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의 영웅은 그 자신과 그의 당면한 환경에 대한 담론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담론이다. 즉 그는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대변인인 것이다. ‘지하생활자도 이미 이데올로기 대표자이다. 그리고 영웅의 묘사의 대부분은 자의식으로 남는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담론은 고백적 담론과 합쳐진다. 결국 세계에 대한 진실은 인간성의 진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데뷔스킨(Devushkin)과 골랴드킨(Golyadkin)을 결정하는 자의식의 범주는 세계관에 대한 기본적 범주가 되었다. 결국 세계관의 가장 고귀한 원칙은 가장 구체적인 개인의 경험을 관장하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친밀한 경험들의, 개개인의 삶의 예술적 혼합이 이뤄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생각으로서 의미화 하는 수용력을 보존하면서 누군가의 다른 생각을 대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을 확정하거나 그것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보존한다. 그의 작품에서 이 생각은 예술적 묘사의 주제가 되고 그 스스로 그 생각의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식의 세계의 진정한 영역을 나타내고, 보고, 보이는 법을 알고 있다. 그 인식은 한 개인의 고립된 의식에 살 수 없고 그것이 다른 인식들과의 진정한 대화적 관계에 진입할 때만 형태를 취하고 발전하고 그것의 언어적 표현을 재생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보이는 것처럼 인식은 영원히 거주하는 권리를 가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심리 형성물이 아니다. 인식의 존재의 영역은 개인적 의식이 아니라 의식 사이에 대화적 교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식은 대화적으로 결합된 언어와 유사하다. 언어와 같이 인식도 다른 입장을 가진 목소리에 의해 듣게 되고 이해되고 대답되기를 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인식의 위대한 예술가이고 단성적인 인식을 거부하였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브(Raskolnikov)의 첫 번째 내적 독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폐쇄적인 의식 내에서 심리적인 진행이 아니다. 반대로 고독한 라스콜니코브의 의식은 다른 이의 목소리와의 투쟁의 장이 되었다. 최근의 일들이 그의 의식에서 반추되었고, 지금 없는 이들과 밀접한 대화의 형태를 취하였고 이 대화에서 그는 그의 생각을 분명히 하려 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브는 그의 생각의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는 신문 기사를 출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디에도 이 기사를 독백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에는 그것의 내용과 포피리(Porfiry)와의 강렬하고 끔찍한 대화에서 라스콜니코브의 기본 생각을 접하게 된다. 포피리는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도발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 내적인 대화적 설명은 끊임없이 라스콜니코브에게 말해지는 질문과 그의 대답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그때 라스콜니코브는 스스로 그 기사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리고 그는 포피리의 도발적인 질문과 논평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결국 라스콜니코브의 생각은 개인의 의식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의 상호 개인적인 지점에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생각의 이론적인 면은 대화의 참가자에 의해 취해진 삶에 대한 궁극적 입장과 불가분하게 연결된다.

대화의 과정에서 라스콜니코브의 생각은 다양한 측면, 뉘앙스, 가능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른 삶의 입장들을 가지는 다양한 관계로 들어간다. 그것이 단일 의식에 맞는 일원론적이고 종결된 자질을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모순적인 복잡성과 관념력의 살아있는 다양한 측면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이미지(an image of the idea)이다.

라스콜니코브의 그런 특성의 생각은 소냐(Sonya)와의 대화에서 또다시 드러난다. 그리고 라스콜니코브의 풍자적 이중인인 스비드리가일로브(Svidrigailov)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마침내 라스콜리코브의 생각은 소설 전체 도처에 삶의 다양한 징후와 연결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징후들에 의해 검사받고, 입증되고, 확인받고, 거부되었다.

예술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철학자나 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을 만들었다. 그는 관념력으로서 삶을 꿰뚫는 인식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는 그의 시대를 위대한 대화로서 듣는, 개개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들 가운데의 대화적 관계를 발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크고 군림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약하고 완전히 나타나지 않은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총체로서의 현실은 즉각적으로 가까운 것에 의해 규명되지 않는다. 이 현실의 압도적인 부분은 아직 잠재해 있고 말해지지 않은 언어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지금 주어진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 사이에 벌어진 투쟁으로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어진 생각이 변화하는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이행할건지, 어떤 방향을 취할 건지를 자주 예측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생각을 대화적으로 교차하는 의식의 경계선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서로 소원하고 무지한 생각과 세계관을 묶고, 멀찍이 분리된 생각들을 확장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생각들 사이의 미래 대화적 접촉에 예견했다.

사상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의 생각들은 예술적 이미지로 변모하였다. 그것들은 불가분의 사람들의 이미지의 결합으로 합쳐졌고 단성적인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히 대화적으로 되었고 다른 이미지 용어들과 동등한 것으로 들어왔다. 또한 그것들은 작가 생각을 종결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죄와 벌같은 단성성의 예외도 존재하지만 결국 예술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승리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형성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데올로기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세계를 보고 묘사하는 원칙으로서 작용하고 작품 내에서의 추상적 인지와 생각의 기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형성적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요인이 부족하다. 분리된 생각과 생각의 체계가 생기게 하는 대상의 통합된 세계이다. 보통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에서는 그것들 스스로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말하는 분리된 생각, 주장, 제안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세계에 동조하지 않는 자의 생각은 참고적 질서의 조직적인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 통합 안에서 생각은 생각과 연결되고 생각은 다른 참고적 기반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은 전체로 이르는 체계 쪽으로 끌리게 되고 체계는 분리된 생각 밖으로 합쳐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면에서 분리된 생각도 체계적 통합에도 관련이 없다. 그에게 극히 불가분한 통합은 분리되고 한계가 있는 생각이나 제안, 주장이 아니라 관점의 필수적인 면이고 인간성의 필수적인 지점이다. 그의 모든 생각 안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총체적으로 인간성이 주어진다. 그래서 생각의 연결은 필수적인 지점의 연결이고 인간성의 연결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생각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관점, 의식, 목소리 안에서 생각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표현되고 들리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생각을 인식하고 만들려고 했다. 응결된 형태에서 생각은 시종일관 그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전체의 정신적 지향을 압축하는 생각만이 그에게 예술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에겐 두 가지의 생각은 이미 두 사람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 생각은 없고 모든 생각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by 그루브21 2014. 12. 7. 16:33

Chapter 2. Concerning the Relationship of the Basis and Superstructures (요약)

 

· 기계론적 인과관계

맑스주의의 본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몇몇 중요한 점에서 언어 철학의 문제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가 토대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결정하느냐는 질문에 주어질 때 그 대답은 인과적으로결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일반적이라 애매모호하다. 인과관계는 유물론적 변증법에 모순되는 기계론적 인과관계(mechanical causality)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계론적 인과관계에 적용의 범위는 자연 과학 내에서 조차도 그 영향력이 좁아지고 있어 그것에 대한 토의는 의미가 없다. 결국 기계론적 인과관계는 이데올로기적 문맥의 통일성과 진실성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인지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필수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 문맥 안에서 주어진 이데올로기적 변화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설명은 상호 반응하는 영역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변화가 이행하는 다양한 단계를 추적해야 한다.

 

·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

기호론적 이데올로기 물질의 구체적인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이데올로기적 현상 연구는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 있다. 예컨대 단지 합리적인 면, 내용적인 면에만 설명되어진다면 그 측면은 바로 토대와 연결되게 된다. 예를 들어 상류 계급이 몰락했으니 문학에서 잉여 인간이 나타난다는 분석을 들 수 있다. 반대로 이데올로기 현상의 외적, 기술적 측면만 고려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방식들은 이데올로기 현상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기계적이고 비구체적인 연구는 어떠한 인지적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잉여인간과 상류층의 경제 몰락과 연관 관계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기계적으로 잉여인간을 소설에 나타나게 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적 구조에서의 대상과 그 예술 장르 모두가 전체로서 설명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인지적 가치를 얻지를 못한다. 그래서 변화(경제적 변화와 잉여인간의 출현)들 사이에 고유의 법칙과 고유의 특성을 가진 질적으로 다양한 영역을 이해해야 한다. 분명히 잉여 인간은 소설과 독립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소설의 다른 요소와 상관없는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잉여 인간과 소설은 각각 서로를 재구성시키는 원인이 되는 상호 의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 The Material of the Word

이런 토대와 상부구조들 사이의 이런 복잡한 상호관계의 문제는 언어라는 질료(the material of the word)를 통해서 상당한 부분까지 설명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기호로서 언어는 토대에 의해 결정되고 생성과정에서 현실을 반영하고 굴절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가 순수한 기호가 아니라 사회적 편재성을 지니는 기호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모든 영역을 통해 흐르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가닥들이 언어 속에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사회 변화의 가장 민감한 지표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데올로기의 질적 위치와 형태를 완전히 가지고 있지 못한 변화의 양적 첨가를 일으키게 하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한다. 언어는 일시적이고 연약하고 순간적인 사회 변화의 단면을 기록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물질화된 사회 심리

일반적으로 사회 심리로 칭해지는 것, 사회 정치적 체계와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일시적인 연결로서 고려되는 것은 사실 언어적 상호 작용(verbal interaction)이다. 사회 심리는 어떤 내면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몸짓, 행동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심리 안에 모든 것은 외적,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생산 관계와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정치적 체계는 모든 언어적 상호 작용의 범위, 형태, 방법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언어적 상호 작용의 형태와 유형은 언어 행위(speech performance)의 형태와 주제를 이끌어낸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사회 심리는 다양한 언어 행위로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 심리는 발화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발화는 마임, 몸짓, 연기 같은 기호적인 발현과 결합된다.

이런 언어적 상호 교류의 형태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의 모든 변동에 극단적인 민감성을 보이는 사회 환경의 조건과 밀접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언어적으로 물질화된 사회 심리의 내적 작용 안에서 후에 완전히 갖추어진 이데올로기 생산물로서 표현될 미세한 이동과 변화가 축적되는 것이다.

 

· 사회 심리에 대한 두 가지 접근 방식

사회 심리는 두 가지 관점으로부터 연구되어져야 한다. 첫 번째는 내용의 관점이다. 즉 그 시점에 적합한 주제의 관점이다. 그리고 둘째로 언어 상호작용의 형태와 유형의 관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는 첫 번째 연구 관점에 국한되어져 왔다. 사회 심리의 구체적인 표현을 어느 곳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명확히 제시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회 심리의 명확히 기술된 표현의 물질적 형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구체적인 형태의 문제는 인간 행동의 기호론적 의사소통의 형태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유형 분류는 맑스주의에게 긴급한 사안이 되었다.

각각의 시기, 사회 집단은 인간 행동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형태의 고유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어왔고, 지고 있다. 같은 종류의 형태들은 그에 상응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의사소통의 형태, 발화의 형태, 주제 사이에는 서로 맞물리는 유기체적 결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화 형태의 분류는 언어적 의사소통(verbal communication)의 형태에 대한 분류에 의존해야만 한다. 후자는 생산관계와 사회 정치적 체계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언어적 상호교환 속에 계급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과 의사소통의 계급적 조직체가 발화 형태에 큰 영향을 구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기호와 존재의 관계

모든 기호는 상호 작용의 과정 안에서 사회적으로 조직된 사람들 사이의 구조물이다. 그래서 신호의 형태는 무엇보다도 관련된 참가자의 사회적 조직체와 상호작용의 즉각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가 변하면 기호도 변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형태와 기호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은 이데올로기 연구의 중요한 임무중 하나가 되어야한다. 기호와 존재 사이의 관계의 문제도 이런 방식만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그래야만 존재에 의한 기호의 인과적 형성 과정이 존재에서 기호로 이행하는, 기호 안에서 존재의 진정한 변증법적 굴절의 과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런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방법론적 전제 조건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1. 이데올로기는 기호의 물질적 실재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의식이나 다른 모호한 영역에 위치시키면 안 된다.)

2. 기호는 사회적 상호 교류의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분리되면 안 된다. (기호는 사회적 상호 교류 밖에서는 단지 물리적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다.)

3. 의사소통과 의사소통의 형태는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 기호의 내용과 평가적 강세

사회적 상호교류를 통해서 발생하는, 언어적 기호를 포함해서, 모든 이데올로기적 기호는 주어진 시대, 주어진 사회 집단의 사회적 시야(social purview)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다뤄왔던 방식과는 다른 측면인 기호의 내용과 그 내용을 모두 수반하는 평가적 강세(evaluative accentuation)에 대해 다룰 것이다.

사회 발전의 모든 단계는 사회적 관심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관심에 의해 평가적 강세를 부여받는 항목의 영역(circle of items)을 가지고 있다. 그 영역의 항목만이 기호의 형성을 이룰 수 있고 기호적 의사소통에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가치적 강세가 부여된 항목의 영역을 결정하는가?

어떤 항목의 체계에서, 그것이 현실의 어떤 영역에서 오던 간에, 집단의 사회적 시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데올로기적 기호론적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 항목은 특정한 집단의 존재의 사회 경제적 전제 조건과 연관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간접적이라도 집단의 물질적 삶의 토대와 연결되어야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개개인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기호는 개개인 간의 창조물이고, 사회적 환경 내에서의 창조물이다. 그래서 항목은 처음에는 상호 개인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그런 다음 기호 형성에 대한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만이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개개인의 목소리, 개개인의 유기체에 의해 생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강세는 사회적 강세이다. 사회적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승인 덕분에 이데올로기적 물질 안에서 외부적 쓰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기호의 대상이 되는 독립체를 기호의 주제라고 부르도록 하자. 각각 완전히 갖추어진 기호는 그것에 맞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언어적 행위도 그것에 맞는 주제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주제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강세화 된다. 이데올로기 주제의 사회적 강세는 개인의 의식에 스며들고 개인의 의식은 사회적 강세를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세의 원천은 상호 개인적, 즉 사회적인 것이다. 동물의 울음, 고통에 대한 반응은 강세가 존재하지 않는 순전히 자연적 현상이다.

 

· 이데올로기적 신호의 주제와 형태 사이의 관계

이데올로기적 신호의 주제와 형태는 불가분하게 서로 엮여있고 추상적으로만 분리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창조물은 같은 기반에 나왔고 본질적으로 같은 것의 두 가지 측면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로 통합되는 과정, 즉 주제와 형태의 탄생은 언어라는 질료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이데올로기적 생성의 과정은 언어에서 두 가지 측면으로 반영된다. 원시인의 구분되지 않는 실제의 덩어리를 사회적 시야로 밝히는, 의미론적 고생물학에 의해서 연구되어지는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거시적인 방법과, 동시대의 뼈대에서 구성되는 것을 밝히는 미시적 방법으로 나뉘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 기호 안에서의 계급투쟁

기호에서 반영된 존재는 단지 반영된 것이 아니라 굴절된 것이다. 이 존재의 굴절은 이데올로기적 기호에서 어떻게 결정되는가? 동일한 기호 공동체 내에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사회적 이해관계의 교차, 즉 계급투쟁에 의해서 결정된다.

계급은 이데올로기적 의사소통을 위해서 동일한 기호 장치의 사용자의 총체인 기호 공동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다양한 계급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들 각각은 다른 강세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다른 강세 체계는 계급투쟁을 대변하고 있다. (Sign becomes an arena of the class struggle. 23p)

이 이데올로기적 기호의 사회적 다강세성은 매우 중요하다. 기호가 활력과 패기 그리고 발전을 위한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이 다강세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기호는 필연적으로 힘을 잃고 우화의 수준으로 퇴보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적 기호를 생생하고 살아있게 하는 것은 또한 그것을 굴절되고 왜곡된 매개물로 만드는 것이다. 지배 계급은 이데올로기적 기호에게 초계급적, 영원한 특징을 부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기호 안에 일어나는 사회 가치 판단 사이에 존재하는 투쟁을 없애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기호를 단일한 강세를 가진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각각의 살아있는 이데올로기적 기호는 야누스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대에서는 이 모순적인 면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기호는 언제나 어제의 진실을 오늘의 것으로도 만드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적 기호를 굴절하고 왜곡하는 방식인 것이다.

· 결론

지금까지 상부 구조와 토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언어적 기호의 물질화는 우리를 토대부터 상부구조로 이르는 과정인 변화의 변증법적 과정의 연속성을 완전히 따를 수 있게 하였다. 이데올로기적 현상에서 기계론적 인과관계의 범주는 언어 철학의 토대에서 아주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12. 7. 13:42

Chapter 1 : The Study Of ideologies and Its Immediate Tasks (요약)

 

· 이데올로기 일반 이론과 개별 현상들 간의 괴리

Literary scholarship is one branch of the study of ideologies. On the basis of the single principle it uses to understand its object, and the single method it uses to study it, the study of ideologies embraces all areas of man's ideological creativity. (3p)

이데올로기 연구의 토대는 맑시즘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이데올로기의 창조물 즉 과학, 예술, 윤리, 종교 등의 개별 항목들의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도 초기 단계이다. 왜냐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일반 이론과 개별 이데올로기 현상에 대한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연구 사이에 변화하고 흐릿한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별 현상들을 사회학적 이해 없이 경제적 토대에 인위적으로 껴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영역들은 각각 언어, 언어에 대한 형태와 장치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굴절에 대한 고유의 법칙을 지니고 있다. 물론 맑시즘은 이런 차이와 다양성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예술, 과학, 윤리, 종교의 개별성은 당연히 상부구조로서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을 모호하게 만들면 안 되지만 또한 그 개별성도 그 법칙으로부터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맑시즘을 토대로 한 개별적이고 사회학적인 방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구조들의 세부 사항과 미묘함으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우리는 이데올로기 체계의 특징과 질적 특이함을 이해하고 정의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문화 철학, 실증주의, 생물학, 경험론, 관념론을 기반으로 한 서유럽의 학문으로는 이러한 정의를 이끌어낼 수가 없다. 이들은 언제나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이데올로기 현상에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 관념론적 문화 철학과 인본주의적 실증주의의 위기

현대 서유럽 학계에서조차도 현실로부터의 문화 철학의 유리와 실증주의, 자연주의로부터의 부조리 양쪽 모두에 대한 불만족이 존재한다. 이는 어떤 종류의 통합의 부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부합하여 유럽 형식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유럽 형식주의는 총체적 일반화와 예술 개별 현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지고 있는 실증주의와 관념론적 철학의 미학에 적대적이었다. 보슬러 학파 (The Vossler school)도 이와 비슷한 언어학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관념론적 철학을 언어와 언어의 역사의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는 시도를 하였다. 문학사에서도 같은 경향이 진행되었다. 이런 경향들은 현상학과 직관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철학의 전형적인 징후는 하만(Hamann)의 저서 Ästhetik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책들은 기존의 미학 책들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철학 체계의 일반적인 요구보다는 예술 학문 자체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와 요구로 진행하려는 욕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네오 칸티즘의 추상적 관념 이론의 시대는 힘을 잃었고 변동성과 다양성에서 삶과 역사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이해하려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The "will to system" has obviously been replaced by the desire to master the concrete world of things and events without losing their living and meaningful unity. (6p)

 

우리는 유물론적 변증법만이 관념론과 실증주의의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부르주아 세계관에 절대적이었던(tertium non datur) 관념론과 실증주의는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불가사의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신비스러울 뿐인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It is necessary to fill the gap between the general doctrine of ideological superstructures and the concrete elaboration of particular problems. (6p)

다시 말해 유물론적 변증법이 왜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현상에 적용시켜 입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적용은 사회학적 견지를 유지해야만 성과를 이룰 수 있다. 또한 사회학으로부터 숨기 쉬운 개별성도 무시해선 안 된다.

 

이데올로기적 모든 창조물(예술 작품, 과학적 성과, 종교적 상징과 의식)은 중요성, 의미, 내적 가치를 물질적 존재와 행동에서 구현하고 있다. 철학적 관점, 믿음 같은 것조차도 언어, 행동, 옷 등을 통해 물질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는 기호적 물질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물질과 그것의 조직화와의 이데올로기적 의미의 연결은 더욱 더 유기체화 되었고 필수적으로 되었다.

현재 학계는 단지 개인의 이데올로기적 가치의 창조와 이해에 대한 생리학적 과정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립된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창조하지 못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데올로기적 창조와 이해는 사회적 상호 작용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부르주아 학계는 물질적 환경의 복잡한 연결을 개인의 의식과 대응하는 의미라는 인위적인 연결로 대치시켰다. 의미와 의식은 부르주아 이론과 문화 철학의 기본 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관념적 철학은 유물론적 실체로부터 자신들의 추상적 이론을 지키기 위해 의미와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초월적 의식 혹은 일반적 의식이라는 개념을 상정하였다.

(이런 부르주아 학계 때문에) We are most inclined to imagine ideological creation as some inner progress of understanding, comprehension, and perception, and do not notice that it in fact unfolds externally, for the eye, the ear, the hand. It is not within us, but between us. (8p)

 

· 이데올로기 연구에서의 당면한 두 가지 문제들

이데올로기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인식과 연구의 통합되고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 접근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적 현상은 인간의 사회적 환경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현상의 물질적 존재들은 물리적이거나 자연적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생리학적 혹은 생물학적 개인은 이데올로기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현상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다. 한 개인 내의 사색, 감정 혹은 쾌락은 이데올로기적 현상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관적 심리학과 생리학, 생물학은 이데올로기적 대상의 의미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 연구에 두 가지 기본 문제를 제공한다.

(1) problems of the characteristic features and forms of organized ideological material as meaningful material; (2) problems of the characteristics and forms of the social intercourse by which this meaning is realized. (9p)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이데올로기적 실제의 반영과 굴절에 대한 맑스주의 교리에 완전성과 정밀성을 제공할 것이다.

 

· 조직화된 이데올로기적 물질의 문제

The primary problem in the first set is the problem of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organized ideological material, i.e., the problem of the characteristics of ideological object as opposed to (1) physical, natural bodies and (2) to the instruments of production and (3) to consumer goods. (9p)

자연주의적 실증주의와 기계론적 유물론은 이데올로기적 대상과 첫 번째 유형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자연적 기계적 규칙성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도로 발전된 과학, 문학 같은 것뿐만 아니라 다른 이데올로기적 창조물에 대한 접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때때로 침투하는 맑스주의를 보이는 실용주의적 실증주의는 두 번째 유형과의 차이점을 무시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대상을 생산 기능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생산 기능은 특정한 의미성이 부족하다. 그것은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반추하지 않는다. 다만 외적인 목적을 지닐 뿐이다. 이런 실용주의의 관점의 허점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 리글(Riegl)은 예술 작품을 실용적 목적, 날 것의 재료 그리고 기술 간의 투쟁으로 발현된 명확하고 의도적인 예술 의지의 결과라고 말한다.

The concepts of artistic volition (Kunstwollen : 예술 의지) and the "resistance of the material," to which are added utilitarian purpose (if there is one) and technique, are presently the basic concepts of West European formalist art scholarship. (10p)

기술은 창조에 대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예술에서 오직 변화시킬 수 있는 인자를 가진 것은 예술 의지뿐이다. 예술 의지는 무기적 간결함, 몸에 대한 진실성, 유기체보다는 무기체 형식의 선호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예술 의지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실용주의적 실증주의는 현대 유럽 예술 학문에서 신뢰를 잃고 말았다. 이데올로기적 대상의 특수성과 이데올로기적 유기적 물질은 모든 곳에서 이해되고 알려졌다.

물론 맑스주의는 이 예술 의지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맑스주의는 실증주의에 대한 현대 예술 학계의 비판을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생산 기능으로부터 의미를 생산하고 반영하고 굴절하는 이데올로기적 대상들 사이의 차이를 면밀히 분석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비재와의 유사성으로 이데올로기적 대상을 보는 이론이 널리 퍼졌다. 이 접근 방식은 부패한 부르주아 작품을 실질적으로 관통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것에는 이데올로기의 쾌락주의적 이론과 부합됐다. 개인의 쾌락과 경험의 대상에 대한 예술 작품의 개념은 필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현상을 개인 소비 생산과 일치시키는 경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데올로기적 생산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고립되고 생리학적 유기체 내에서 인식되는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음식을 섭취하거나 옷이 사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은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 작품을 개인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신조는 맑스주의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에 의해 거부된 이 신조는 형식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물질과 의미

이데올로기적 대상을 자연적 대상, 생산 기능, 소비재와 대치되는 것으로 보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결론 후에 우리는 이데올로기 자체의 세계를 더욱 더 연구해야한다. 이런 연구는 추상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라 구체적인 유물론적 실제, 사회적 의미의 관점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연결은 매우 유기적이다. 예를 들어 예술의 의미는 물질적 몸체의 세부 사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대체가 가능한 과학적 작품과는 달리 예술 작품은 최소한의 요소를 제외하고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특정한 몸체와 의미가 필연적으로 엮여 그것만의 예술적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어느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의미만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수행하는 사회적 연결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조직되고 이끌어진 행동과 상호작용의 합은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의 두 번째 문제인 이데올로기적 상호 교류의 형태와 유형의 문제는 거의 연구가 안 되어졌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삶을 의미에 병치된 하나의 의식으로서 보는 관념론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적 상호 교류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과학적 상호 교류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예술적 상호 교류의 형태는 외부의 상황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양해지고 달라진다. 예술적 상호 교류의 형태는 예술 작품의 구조를 결정한다는 서유럽 예술 학회의 연구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청중, 독자 같은 외부적 상황이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데올로기적 환경

우리가 지금까지 열거한 문제 말고도 현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주의 연구의 다른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이데올로기적 환경의 문제라고 부른다.

사회적 인간은 이데올로기적 현상에 둘러싸여 있다. 이데올로기적 현상은 이데올로기적 환경을 구성한다. 인간의 의식은 바로 이 환경에서 생동하고 발전한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존재들을 직접으로 접촉하지 않고 둘러싸여 있는 이데올로기 세계의 매개를 통해 접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환경은 개개인의 의식을 결정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데올로기적 환경을 통해서만이 사회 경제적, 자연적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환경은 끊임없이 활발한 변증법적 생성의 과정에 있다. 그래서 반박은 언제나 존재하고 새로운 것이 다시 생성된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독특하고 완전히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적 환경이 존재한다. 이런 특성을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은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의식과 행동은 또한 이데올로기적 환경을 결정하는 순환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에 대한 개념이 맑스주의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맑스주의 말고 다른 사상들 즉, 문화 철학, 실증주의, 자연주의, 실용주의는 이 이데올로기적 환경에 대한 개념을 왜곡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맑스주의자들 마저도 이데올로기적 환경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데올로기 세계의 개별 존재가 경제적 요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된다는 순진한 생각에 빠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맑시즘 이데올로기 연구가 직면한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이 문제들에 대한 철저하고 깊은 완성만이 맑시즘의 사회학적 방법 내에서 요구되어지는 파생으로 이끌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현상의 개별 구조의 세부사항을 숙달하게 만들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12. 5. 19:24

Chapter 2 : Two trends in Modern Psychology (요약)

 

This motif runs throughout the psychoanalysts' theories at all levels. (17p)

이 동기는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생철학(Philosophy of Life)의 동기를 말한다. 이 생철학의 동기를 생물학적 생이 철학 체계에서의 중심을 차지, 의식에 대한 불신, 객관적 사회 경제 범주를 주관적 심리적 생태적 범주로 대체하는 것으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Nevertheless, a fairly widespread opinion has it that, notwithstanding the faultiness and untenability of its basic ideological motif, psychoanalysis still does contain a sound, scientifically valuable core, which is, namely, its psychological theory. (17p)

프로이트의 이론은 부르주아 세계의 붕괴 및 퇴폐의 징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프로이트주의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동기는 역사에 대한 두려움, 심연의 유기체에서 사회·역사적 측면을 초월한 세계를 추구하는 현대 부르주아 철학의 동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정신 분석학의 심리학적 이론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생각의 지지자들은 이 이론이 다른 철학적 세계관과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맑시즘이 심리학에게 하는 요구에 가장 부합된다고 말한다.

 

· 현대 심리학의 주요 경향 (실험 심리학과 객관적 심리학)

At the present time, both in Europe and here in the USSR, two trends in the study of the psychical life of humans and animals are engaged in spirited controversy. This is the controversy between objective and subjective psychology. (18p)

대표적 주관적 심리학으로는 실험 철학(Experimental Psychology)을 들 수 있고 객관적 심리학은 반사학(Reflexology)과 미국에서 유행하는 행동주의(Behaviorism)을 들 수 있다. 주관적 심리학과 객관적 심리학을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두 가지 심리 생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의 두 가지 심리 생활은 생각, 감정, 욕구 같은 정신적 경험과 타 유기체에 반응하는 외적인 표현을 말한다. 전자는 주관적 심리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제는 외적인 표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순수한 주관적 심리학자는 없다. 외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에 의해 보충되고 조절되는 이 주관적 심리학을 실험이라는 의도적인 장치로 풀어내는 것을 실험 심리학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험자의 관찰보다는 피 실험자의 자기 관찰이 더욱 중요시되기 때문에 실험 심리학은 내적 체험을 중시하는 주관적 심리학인 것이다.

반면에 실험 심리학이 중시하는 내적 체험에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객관적 심리학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은 피 실험자의 내적 체험이 실험자의 외적 이해의 진실성과 일관성을 위태롭게 한다고 문제 제기한다. 이들은 삶에서 의미를 가지는 모든 것은 외적인 물질적인 양으로 제시되어야 하고 순수한 물질적 변화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순수한 물질적 양이 행동이라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행동만이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 심리학이 중시하는 내적 관찰은 심리학의 객관성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객관적 심리학자들도 실험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피 실험자의 내적 관찰도 외적 관찰의 언어로 번역하여 통일성과 진실성의 약화를 방지한다.

내적 체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바꾸는데 부합되는 것은 언어이다.

 

Verbal reaction is a phenomenon of the highest complexity. It consists of the following components:

1. The Physical sound of articulated words;

2. Physiological processes in the nervous system and in the organs of speech and perception;

3. A special set of feature and processes that correspond to the "meaning" of a verbal statement and the "understanding" of that meaning by another person or persons. (21p)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세 번째이다. 이것은 생리학적 유기체의 한계의 초월과 유기체 간의 상호 작용을 수반하는 사회학적인 특징을 띈다. 이 상호 작용에서 수반되는 시각, 운동, 청각 반응의 연결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이는 이 연결을 형성하는 방법과 수단이 외적 체험과 연구의 객관적 방법을 원칙적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언어적 특징은 외적 발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내적 발화도 포함이 된다. 내적 발화도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 심리학자들은 피 실험자의 내적 체험을 외적이든 내적이든 언어적 등가물로 대치할 수 있다면 외적·물질적 경험의 진실성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심리학에 대한 맑시즘의 요구

Marxism is far from denying the reality of the subjective-psychical. Such a thing does exist, to be sure, but under no circumstances can it be divorced from the material basis of the organism's behavior. (21~22p)

심리적인 것은 유기체가 갖는 특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을 물질과 대등하게 대치시킬 수 없다. 반대로 물질의 조직화와 복잡화를 통해 심리적인 것이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물질적이다. 이런 점에서 맑시즘은 객관적 심리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맑시즘(변증법적 유물론)은 객관적 심리학자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중요한 요구를 한다. 인간 심리학은 사회학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행위는 사회적 환경의 조건에서의 자극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적 발화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언어적 반응의 형성도 사회적 환경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심리학은 객관적 방법뿐 만아니라 사회학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 정신분석학과 맑시즘

Freudians, as indeed Freud himself, look upon the Freudian doctrine as the first and only attempt at constructing a truly objective, naturalistic psychology. (22p)

그리고 러시아 심리학, 철학 저작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에 동조하고 정신 분석학이야말로 맑시즘의 요구에 가장 부합되는 이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객관적 심리학과 맑시즘 대표자들이 이에 다른 의견을 내기 시작하였다. 이런 반론은 그것의 논지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 심리학이 특히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다. 이는 순진한 기계론적 유물론이다. 이는 자연과학보다는 생물학, 특히 심리학에서는 재앙이 될 수 있다.

 

The fact is that critical analysis of Freud's psychological theory will bring us directly in contact with precisely the issue that is of utmost importance and difficulty in human psychology-the issue of verbal reactions and their meaning in human behavior as a whole. (23p)

성적인 영역에서 많이 설명하는 프로이트는 이런 어려움을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으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충분한 예를 제시함으로서 자신의 이론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그는 모든 현상의 사회학적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개개인의 유기체와 심리라는 협소한 테두리로 가두려 했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이것은 사회적 진공상태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성질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외적인 객관적 관점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고 자기 관찰적·주관적 관점으로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 중립성과 프로이트주의

From what we have already said by way of preliminary orientation, the reader can cleary see that the psychological, that is, the technical-scientific, side of Freudianism is by no means neutral with respect to its general ideological and class position-a position so vividly expressed in its basic philosophical motif. (25p)

이런 프로이트주의의 비중립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개별 과학의 중립성은 불가능하다. 모든 과학적 이론은 세계관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계급투쟁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과학적 이론의 주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급투쟁에서 집단이 갖는 기본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론은 그것이 반영하는 객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를 반영하는 양면 거울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주의의 이 양면이 동시에 연구되어져야 한다.

 

by 그루브21 2014. 12. 5. 17:15

 

 

마르크스주의와 언어 철학은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소쉬르의 언어관에 반론을 제기하는 바흐친 학파의 언어관을 대표하는 책이다. 바흐친 학파는 이 책을 통해서 언어가 모든 현상에 개입(The word is the most sensitive index of social changes)하고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언어는 소쉬르가 말하는 자의성을 가지고 단순히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계급층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굴절된다는 것(Existence reflected in sigh is not merely reflected but refracted)을 바흐친 학파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 안에서는 계급투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언어는 수많은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진 다강세적(multiaccentuality)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 외의 이데올로기를 억압해 단일 강세(uniaccentual)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빈번히 접할 수 있다.

 

by 그루브21 2014. 2. 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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