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ll Flanders에서 나타난 도덕과 욕구와의 불일치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왜 선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는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행위 그 자체가 기존 권위 체계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그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구성원들에게 은연중에 선함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함이란 표면적으로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법 등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을 뜻하지만 사실 내면적으로는 사회 지배 계층의 논리에 반기를 들지 않는 선함(순종)의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렇듯 권력자는 인간의 선 즉 기존 체계에 순종하는 인간상을 보이지 않게 강요함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인간의 의무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추구 속에 이런 권력자들의 책략이 숨어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양 세계에서는 권력자들 자신을 위해서 특히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악용하였는데 이런 흐름은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고 결국에는 악은 선에 의해 극복되어져야할 존재로서 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오직 선으로만 존재해야한다는 주장을 강요받고 악은 지극히 없어져야 할 존재로서 인식되어졌다. 하지만 선과 악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시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니체(Nietzsche)는 선과 악을 서로 대립적 존재로 볼 수는 있지만 서로의 존재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한 양극적인 대상으로서 인식하였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그의 선과 악에 대한 새로운 시선으로 기존의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런 니체의 선언은 아직까지 남아있던 중세적 그리스도 세계관의 몰락의 선언이었다.

또한 스피노자(Spinoza)는 선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장하였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다른 동물들이나 심지어 신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것으로 생각했다.(스피노자, 윤리학) 스피노자 이전에는 서양의 그리스도교뿐 만 아니라 동양의 유교 사상처럼 이런 인간의 욕망을 무시하고 억제되어야 할 존재로서 보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이는 인간의 욕망 자체가 이기심의 원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욕망은 악에 가까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은 선이나 악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었다. 스피노자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 사실상 우리의 삶 자체가 욕망의 발현이고 사람들은 그 욕망의 에너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욕망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평가는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그리스도교가 절대적 본질이라 정의한 선과 악에는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그 시대의 사회적 욕망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욕망은 지속적으로 변화해감에 따라 개인의 욕망도 영향을 받고 변화해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욕망이라는 것도 하나, 하나의 개별 욕망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때문에 개개인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욕망과 개인 욕망의 관계도 사회에서 개인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호 관계로서 이해되어져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과 악의 관계에 대한 기존 윤리관에 반론적인 새로운 생각들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선악의 윤리관이 이 세계에서 우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같은 새로운 생각들로 인해 기존 윤리관의 절대성은 헐거워졌음을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이런 헐거워진 풀림이 18세기 초의 소설인 다니엘 드포 (Daniel Defoe)의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을 통해 어떻게 발현되었고 이 소설이 그 풀림의 어떤 단초가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하겠다.

 

2. 권력의 음모

 

I Was continu'd here till I was eight years Old, when I was terrified with News, that the Magistrates, as I think they call'd them, had order'd that I should go to Service; I was able to do but very little Service where ever I was to go, except it was to run of Errands, and be a Drudge to some Cook-maid, and this they told me of often, which put me into a great Fright; .... I told her that if she wou'd keep me, I wou'd Work for her, and I would Work very hard. (p11~12)

 

몰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삶을 암묵적인 사회 약속에 억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서 개척해 나갈 줄 아는 인물이었다. 8살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판사의 요구에 극한 공포심을 느꼈지만 그녀는 유모에게 바느질과 방적일로서 그녀를 돕겠다고 해 결국은 하녀로서 살아야할지도 몰랐던 위기를 모면한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몰 같은 비천한 배경을 가진 아이라면 하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였다. 몰의 시대는 의무 교육 같은 장치가 보장되는 현재와는 다르게 계층적 질서가 확고해서 어릴 적부터 계층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8살 정도의 어린 여자 아이가 당시대 사람이라면 자기가 속한 계층에 따라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 혹은 의무를 거부하고 그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몰은 왜 이례적인 일탈이 가능했을까?

피지배 계층의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배 계층의 논리를 적극적이든, 강제적이든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지배 계층 정도의 동등한 위치와는 비할 수는 없지만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요소들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배 계층과 피 지배 계층의 관계는 계약적 관계라는 특성을 띤다. 그러나 지배 계층이 자신의 권력을 더욱 더 확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 기만적인 전략을 추가로 사용하게 된다. 이런 기만성으로 전략의 목적을 숨길 수 있고 피지배층으로 하여금 그 전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전략에 대한 수용에 대한 은밀한 보상으로 그런 작용이 더욱 더 고무되었다. 이런 기만적 전략의 문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카스트(Caste) 제도이다. 간디도 문제 제기하지 못한 절대적인 인도의 오랜 신분 제도는 윤회와 업을 대표로 하는 특유의 내세관과 결합하여 그 권력을 더욱 더 강화되었다. 각각의 계급에 맞는 확고한 임무가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세적 세계관이 고양시키는 현실 세계에 대한 무감각이 피지배층이 자신의 신분적 질서 따른 한계를 지배 계층에 항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18세기 초의 몰이 살았던 영국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 사회 같은 강력히 고정되고 내세관이 만연한 사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와 유사한 논리가 분명 존재한다. 기존의 서양 특유의 신분 질서와 천당과 지옥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인 내세관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영국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 의하여 이미 17세기 중반에 왕권이 무너졌고 후에 명예혁명으로 인하여 왕권의 권위의 하락은 더욱 고정화되었다. 이런 왕권의 몰락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빨랐고 시민 혁명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혁명보다 무려 100여년 빨랐다. 그리고 영국의 왕이 가톨릭 교회에서 독립한 교회의 수장이었다는 점에서 왕의 권위의 몰락은 종교적 권위의 몰락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이런 영국 특유의 사회 요인이 몰의 권위에 대한 일탈적 경험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외적 상황뿐만 아니라 몰이 가지고 있었던 개인적 경험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몰은 감옥에서 출생하여 이후에 집시들과 함께 유랑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몰은 그들과 외모에서도 차이가 있어 집시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고 하였지만 이 기억이 몰이 자신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었다는 언급은 아주 주목할 만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집시(Gipsy)9세기 경 인도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해 지금은 한국, 일본 같은 몇몇 나라를 제외한 거의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유랑 민족이다. 이들은 특유의 타문화의 배타성과 방랑 기질로 인하여 집시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이런 집시들과의 어린 시절 유랑은 앞서 제기한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 어떻게 몰이 어떤 체계 즉 권력의 음모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특성을 갖게 됐는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3. 비도덕주의

 

But as this Work is chiefly recommended to those who know how to Read it, and how to make the good Uses of it, which the Story all along recommends to them; so it is to be hop'd that such Readers will be much more pleas'd with the Moral, than the Fable, with the Application, than with the Relation; and with the End of the Writer, than with the Life of the Person written of. (p4)

 

드포는 몰 플랜더스서문에서 이 글을 독자가 작가의 목적인 교훈을 통해 기쁨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정작 본문에서 몰이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는 드포의 서문과는 상당히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몰도 드포와 마찬가지로 도덕에 자유롭지 못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그녀의 행위와의 일치성이 보이지 않고, 뉴게이트 감옥에서 목사와의 만남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이만 하지만 결국 자신이 회개한 이유는 처형될 수도 있는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는 자기 고백으로 미루어보아 드포가 서문에서 말한 이 글의 목적과는 다르게 그녀의 이야기가 흘러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포의 서문과 몰의 서술의 상이한 분위기의 이유는 여러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드포 자신의 경험과 연관이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비국교자를 처리하는 지름길(The shortest Way with the Dissenter)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몰의 서문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자신이 왕당파의 일원인 것처럼 가상해 신교도를 모두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 글 때문에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친구의 도움으로 가벼운 벌만을 받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김현숙, 몰 플랜더스에 나타난 아이러니 참조) 이런 경험 덕분에 드포는 몰 플랜더스라는 소설이 일으킬 수 있는 논란에 대한 보험으로 서문을 그렇게 작성한 것이다.

이는 작가적 상상력이 사회의 억압적 윤리관과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모순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모순은 드포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몰에게서도 이런 모순은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몰 플랜더스 같은 범죄 소설에서 즐거움을 얻는 독자들에게서도 충분히 함께 공유될 수 있는 모순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욕망을 꿈꾸지만 그 시대의 윤리관 같은 당위성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그들 중에서 몰이 가장 그 당위성에서 자유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드포는 몰을 통해서 자신을 억누르는 당위성에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당당하지 못했고 독자는 몰 같은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행위로 위안을 삼았다. 반면에 몰은 비록 당위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사회적 신분·윤리관·법에 대한 일탈에 의하여 드포나 독자들에 비해 당위성에 가장 당당한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윤리관이란 선과 악의 이분법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이 동양과 다른 점은 선을 행함에 있어 나타나는 희생의 정당성을 신의 보상으로서 설명한다는 점이다. 반면 동양, 특히 동북아권의 윤리는 군주, 부모, 형제, 이웃 같은 타인으로 그 선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윤리관이 지배적인 서양 사회에서의 몰은 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그 사회의 이단적인 인물이다. 비록 신께 참회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고는 있지만 이는 자신의 정당화의 한 수단에 불과했고 그녀의 진정한 주요 관심은 현실 세계였다. 그녀의 이런 현실감은 특히 돈에 대한 집착으로서 극대화된다. 그녀는 아직 완전히 인생관이 완전히 잡히기 전이었던 순진한 시기에서의 큰아들과의 첫 성경험 때도 그에 대한 대가로 내민 돈을 그녀는 일말의 죄책감 없이 받는다. 이는 몰의 특수한 개인적 배경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지만 18세기 초 영국이 가진 사회 전체적인 변화에 의해 돈의 의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세 시대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 Francis의 청빈생활이 많은 사람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지만(한천궁, 몰 플랜더스 소고) 청교도 혁명이 영향을 끼치면서 빈부에 대한 가치 척도가 바뀌게 되었다. 탐욕의 상징이었던 부가 이제부터는 근면의 상징으로 전도되면서 가난한 대중들의 부의 추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바로 이런 풍조는 몰의 돈에 대한 집착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큰 형의 배신으로 인해 남성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 돈은 몰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으로 더욱 승화되었다.

 

4. 욕망의 희생물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통해서 이성과 욕망을 상반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인간의 욕망을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충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 내지 규칙에 따라 작용하는 힘 내지 움직임이다.(김주미, 몰 플랜더스의 개인적 자유) 이런 관점에서 은행원 남편이 죽었을 때 몰이 결국 절도의 세계로 자신을 내모는 모습을 보면 이 욕망이 단순히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을 알게 해준다.

 

I am very sure I had no manner of Design in my Head, when I went out, I neither

knew or considered where to go, or on what business; but as the Devil carried me out and laid his Bait for me, so he brought me to be sure to the place, for I knew not whither I was going or what I did.... This is the Bait; and the Devil who I said laid the Snare, as readily prompted me, as if he had spoke, for I remember, and shall never forget it, 'twas like a Voice spoken to me over my Shoulder, take the Bundle; be quick; do it this Moment; (p151)

위의 몰의 서술을 통해서 그녀는 단순한 충동이나 목적에 의한 행동이 아닌 알 수 없는 악마에 의하여 자신이 조종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 악마가 그녀 자신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윤리관으로부터의 비난을 모면하고자 했다. 그 이전까지 그녀는 이미 사회의 윤리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지만 절도는 그녀에게 완전 새로운 일탈이었기 때문에 악마라는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조정하는 악마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자신의 윤리적 도피처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절도는 그녀의 의식 안에서 충분히 인지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의식은 또한 앞으로도 그녀가 그런 상황에 내던져지게 되면 절도 행각 같은 일탈을 계속 벌일 것임을 이미 예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절도 행위가 자신만의 자유 의지로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면 한 개인의 욕망은 사회적 욕망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종되어지는 개인의 욕망은 자신이 사회적 욕망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실제로 몰이 처음부터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이유도 귀부인(Gentlewoman)이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돈으로 귀부인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은 그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시대가 돈이라는 물질적 수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살펴보자면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Enclosure) 운동 등으로 지방의 농민 등 하층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런 계급의 혼란 속에서 그들 자신들의 생존과 계급 상승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돈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하층민들의 욕망은 같은 계급에 속하는 몰의 욕망에 자연스럽게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욕망이 몰의 정체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는 의문스럽다. 몰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고 일생 내내 일관적인 관점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몰의 변함없는 캐릭터가 오히려 사회적 욕망과의 불일치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변화해 가는데 변화하지 않고 고정되고 영원한 신이 아닌 그녀의 일관성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이해의 어려움은 인간의 맹목성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몰은 자신만의 가치를 사회의 가치로 대치시켰기 때문에 본연의 자신만의 캐릭터가 드러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몰은 사회의 욕망에 의하여 억압되어 자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인물이다. 결국은 몰은 자신이 처음 본 존재인 개가 자신의 엄마라는 것을 영원히 믿는 오리 같은 존재이다. 자신의 자아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정시키고 자유롭게 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는 유연함의 부재를 겪는 몰은 사회적 욕망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5. 나가는 말

 

몰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의 창출은 기존의 권력의 체계, 기독교 윤리관의 억압, 이성중심주의 사유를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초월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 의미성을 배가시켜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그런 몰의 캐릭터가 남성 작가에 의하여 창출됐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몰 플랜더스는 이런 초월성과 함께 남성 작가에 의한 여성 캐릭터의 창출의 한계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 한계성은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같은 페미니스트(Feminist)가 지적하는 여성적 특징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스트가 남성성과 대비되고 여성만의 장점이자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유동성(fluidity)이 몰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의 원인을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남성 작가에 의하여 남성적인 혹은 고정적인 여성 캐릭터가 만들어 졌다는 말이다. 이는 앞서 말한 논증한 몰을 사회적 욕망의 희생자라고 보는 시각과 함께 몰의 고정된 캐릭터의 원인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몰을 남성 작가에 의하여 왜곡되어진 캐릭터라고 단정 짓더라고 몰 플랜더스라는 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왜곡도 결국은 우리 세계가 가지는 세계의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몰이 여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장치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 확대는 자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페미니스트적 관점, 특히 분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 보편적 관점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by 그루브21 2013. 12. 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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