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문화주의와 문화 혼종성

혼종성(hybridity)과 비슷하게 사용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는 국제화 시대를 맞아 다른 민족, 다른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특히 제 3세계 같은 약소국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학계에서는 이 다문화주의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피터버그는 이제 국제 사회는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인 다문화주의보다는 적극적이고 진행적인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에 따라야한다고 역설한다.(문화혼종성, 이음, 2012) 그래야만 국가, 민족, 지역을 초월한 범지구적 문화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혼합체가 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사실 혼종성의 개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비롯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되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로서 분류되는 족두리를 쓰거나 연지를 찍는 풍속은 원래 몽골에서 유래되어 우리의 문화와 융합된 대표적인 혼종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과 우리 문화와의 혼종이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닌 혼종성이라는 것이 요즘에 더욱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표면적인 원인을 들자면 교통, 통신 등의 기술의 발전으로 이질적인 문화 충돌의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할 요인은 이런 외적인 양적·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팽창되어가는 관계의 밑바탕에 은밀히 자리 잡고 있는 요인, 즉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낳은 굴절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을 꼽을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은 지배층·피지배층 양쪽 모두를 굴절된 행위의 대리인으로 이끌게 만든다. 프란츠 파농은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하얀 가면을 쓰고 싶어 하는 흑인, 흑인 가면을 두려워하는 백인으로 이런 양쪽 모두에게 가해진 굴절을 잘 표현한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2013) 하지만 굴절의 방향은 현재의 상태 혹은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에 피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라도 현재 지위가 지배를 했던 나라를 능가한다면 굴절의 양상은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경우로 미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경우를 일반적인 식민·피식민 관계로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 미국도 넓게 본다면 결국은 원주민인 인디언을 힘으로 제압한 제국주의적 국가이고 미국과 영국은 기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을 제외한다면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상하 관계를 뒤엎은 나라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생성된 굴절의 양상은 지금 이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의 악마의 시(Satanic Verses)는 바로 이 굴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굴절은 단지 지배층과 피지배층, 즉 영국과 인도의 제국주의적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욕망의 주체, 폐쇄적 소통, 비평의 부재,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확대되고 있다.

또한 Satanic Verses는 워낙에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있고 특히 Gibreel의 꿈을 묘사한 부분은 ChamchaGibreel의 현실세계를 묘사한 부분과 모순되게 표현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당혹감을 들게 한다. 그래서 서로를 별개의 작품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두 부분의 숨겨진 연관성을 찾아야하는지를 읽는 이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Roland Barthes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가설들을 해체시키고 독자와 언어와의 관계의 위기를 일으킨다라고 말했다. (The Pleasure of the Text, Hill & Wang, 1975) 다시 말해 기존 독자의 사고방식에 순응하는 작품은 지루함만을 일으키고 문학작품으로서의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같은 Barthes의 포스트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Satanic Verses는 희열의 텍스트의 필요조건은 일단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충분조건은 모순되어 보이는 두 부분의 연관성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2. 불안한 최초의 섞임

'Give it.' It seemed to him in later that his father had been spying on him throughout his childhood, and even though Changez Chamchawala was a big man, a giant even, to say nothing of his wealth and public standing, he still always had the lightness of foot and also the inclination to sneak up behind his son and spoil whatever he was doing, whipping the young Salahuddin's bedsheet off a night to reveal the shameful penis in the clutching, red hand. And he could smell money from a hundred and one miles away, even though the stink of chemicals and fertilizer that always hung around him owing to his being the country's largest manufacturer of agricultural sprays and fluids and artificial dung.

 

대다수의 자식들은 부모와의 관계 혹은 모방을 통해서 사회성의 첫출발을 한다. 그러나 이런 관계 혹은 모방의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오히려 부모를 추종의 대상에서 성장의 장애물로서 인식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쉽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타자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또 다른 분신으로서 자신과 동일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과 타자로서의 거리두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과의 일치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런 부모의 욕망은 자식의 그것과 필연적으로 일치할 수가 없다. 결국은 욕망이란 순수한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인 타자의 존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공동체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타자 때문에 참자와 창게즈의 욕망은 서로 일치할 수가 없었다. 창게즈가 돈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은 그의 지나친 속세적인 면에 대한 비유임에 동시에 결국 그가 어떤 타자의 시대에 살았는지를 잘 표현해준다. 다시 말해 돈에 대한 집착은 가난이라는 타자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자는 그런 가난이라는 타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창게즈 덕분이지만 참자는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새로운 타자에 영향 받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마침내 참자는 어린 시절 파운드화가 암시하였던 욕망, 즉 영국으로 대변되는 욕망에 빠져든다. 헤겔(Hegel)은 일찍이 정신 현상학이라는 책을 통하여 이런 욕망의 타자성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사실상 욕망의 본질은 자기의식이 아닌 타자에게 안겨지는 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의식에게 욕망의 진상이 밝혀진다.” (정신현상학, 한길사, 2005)이런 욕망의 타자성에 대한 논의가 개인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것은 경계되어야겠지만 욕망의 타자성은 인간의 속성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의 타자성이라는 문제는 부모와 자식, 그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하기 어려운 이유인 억압된 남성성과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 억압된 남성성이란 원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잘 드러낼 수 있었던 남자 아이가 남성다움이라는 문화를 강제적으로 학습하면서 점점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감추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남성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도 서툴게 되고 결국 남의 감정과 소통하는 데에도 서툴게 된다. (EBS ‘심리다큐 남자에서의 대사를 본 글에 맞게 수정 인용) 아들의 성기를 드러내기 위해 이불을 홱 걷어내는 창게즈의 일방적인 모습도 타인과의 공감을 이루는 능력에 대한 서투름에서 비롯되었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환되면서 남자들은 많은 책임감을 강요받았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보다는 가족에게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부여받은 이름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은 사라지고 남성성을 가진 인간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 특히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성은 타자의 욕망에 의하여 가장 큰 공격을 당한 희생물인 것이다. 따라서 역할로서의 남성이 아닌 한 개별 개인으로서의 남성의 이름을 회복이 타인과의 공감 능력의 복귀를 불러오고, 더 나아가 혼종이라는 시대의 소명에도 긍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3. 관점의 한계

When Mishal, Hanif and Pinkwalla ventured into the clubroom several hours later, they observed a scene of frightful devastation, tables sent flying, chair broken in half, and, of course, every waxwork - good and evil - Topsy and legree - melted like tigers into butter; at the centre of the carnage, sleeping like a baby, no mythological creature at all, no iconic Thing of horns and hellsbreath, but Mr Saladin Chamcha himself, apparently restored to his old shape, mother-naked but of entirely human aspect and proportions, humanized - is there any option but to conclude? - by the fearsome concentration of his fate.

 

현실에서 소통이란 단어는 원래 가지고 있는 개방성, 유연성이란 의미에서 폐쇄적, 경직성의 의미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만남에서 소통을 이루려면 서로 일정한 범위내의 생각의 일치를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서 정립되어가는 현상에 대한 관점이 그릇된 폐쇄적 소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립된 관점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많은 사회·정치적 대립 현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라깡(Lacan)이 상상적 단계의 아이들이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 상징적 세계로 던져지면 다시는 상상적 세계로 못 돌아온다는 설명과 같은 맥락이다. (Ecrits, A Selection, 1977) 물론 실재계라는 세계가 존재하지만 현실 세계의 이면에만 존재하는 현실로의 출현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하지만 이 Satanic Verses는 판타지 소설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참자는 지브릴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킴으로서 상상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 선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시 아기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지브릴에 대한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오비디우스를 버리고 루크테티우스를 선택한, 즉 자신의 변화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굳어진 자신의 관점을 다시 되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열등감, 경멸 그리고 영국에 대한 숭배, 열망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의 굴절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나 참자의 이런 신비스런 회귀가 지브릴에게도 참자에게도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그 이후의 참자의 지브릴에 대한 집요한 복수는 회귀 이전의 참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참자는 아이들처럼 사태의 배후와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태 곧 지브릴에 대한 복수와 바로 밀착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집요한 복수를 감행할 힘을 얻는다.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휴머니스트, 2007)의 글을 본 글에 맞게 수정 인용)

지금까지 관점의 부정적인 면만 서술하였지만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관점이라는 것은 아주 필수적이고 자연스런 것이다. 레닌(Lenin)무당파가 가장 당파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관점이 없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설상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을 선언한 이면에도 힘이 없는 나라로서의 정치적인 포석이 깔려있는 것이다. 또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신비평이라는 문학비평사조를 소극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간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Literary Theory, Wiley-Blackwell, 2011)

결국은 문제의 초점은 고정되어가는 관점의 속성을 얼마나 지체시킬 수 있느냐에 집중된다. 그래야만 더욱 난잡해지고 복잡해지는 세계가 갈등과 불신의 길이 아닌 화합과 평화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4. 경험적 지식의 한계

The foundling was perhaps two weeks old, clearly illegitimate, and it was equally plain that its options in life were limited. .... The Imam examined the baby briefly; rose; and turned to address the crowd.

'This child was born in devilment,' he said. 'It is the Devil's child.' He was a young man.

The mood of the crowd shifted towards anger. Mirza Saeed Aktar shouted out; 'You, Ayesha, kahin, What do you say?'

'Everything will be asked of us,' she replied.

The crowd, needing no clearer invitation, stoned the baby to death.

 

위 인용문구에서 아기를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악마의 아이로 단정 짓고 돌로 그 아기를 살해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이렇게 잔인하고 광기의 행위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그의 저서인 자본론에서 상품 분석을 맨 서두에 둔 이유는 상품들을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총체성에 도달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추상화의 단계, 즉 비평의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대용량의 정보의 시대인 현재에도 끊임없이 현상에 대한 비평적 사고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보로서 대표되어지는 경험적 지식의 부족보다는 비평적 사고의 부족이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Lukács의 물화 이론에 대한 이택광 교수의 강의 수정 인용) 화냥년이나 호래자식 같은 말들은 이런 비평적 사고의 부족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말들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있는 유교적 도덕규범 같은 지배적 의식들이 기본적 상식적 사고를 유린하는 모습인 것이다.

이런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모습을 빈번히 보여주는 것은 그 집단이 얼마나 경직된 조직인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경직된 조직은 전체주의적 집단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다분히 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전쟁 같은 재앙을 최근에 겪은 집단은 그 구성원들에게 군대적인 마인드를 강요한다. 지휘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권위적인 조직체를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단에는 이원론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지휘 체계에 부합되는 것과 아닌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합되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억압되고 착취당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만약 지휘 체계가 자신의 방향을 잃고 광기로 흐른다면 인용 문구처럼 그 광기에 동조하게 되거나 아니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또한 사람들을 비평적 사고의 부재의 길로 모는 이유로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소극적인 자유를 이유로 들 수 있다. 사이드의 부인 미샬이 이 무모한 순례에 참여하는 계기는 자신의 불행 즉 암선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도피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외면하게 만들고 우물 속에서 발견된 신라 아이의 유골같이 왜곡된 일치를 부추긴다. (KBS 역사 스폐셜 신라 우물 속 아이의 미스터리(신라 말의 극한 혼란과 가난을 대변하는 인신공양)) 고난의 순례 때문에 죽은 사르판치의 부인을 외면한 티틀리푸르의 순례자들의 행동과 자신들의 고난과 불행 때문에 우물에 아이를 공양으로 바친 신라인들의 행위는 본질적인 같은 것이다.

 

5. 새로운 시대

When the news got around Jahilia that the whores of The Curtain had each assumed the identity of one of Mahound's wives, the clandestine excitement of the city's males was intense; yet, so afraid were they of discovery, both because they would surely lose their lives if Mahound or his lieutenants ever found out that they had been involved in such irreverences, and because of their desire that the new service at The Curtain be maintained, that the secret was kept from the authorities.

 

Satanic Verses에서 Gibreel의 꿈을 묘사한 부분, 즉 마호메트의 열두 부인을 창녀로 비유하는 모습 같은 이슬람교에 대한 모독이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하는지에 대한 격한 논쟁이 서방과 이란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 간에 발생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이란의 국교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는 것을 미루어보아 작가의 금기에 대한 표현은 이질적인 문화 사이의 혼종성의 관점으로 볼 때 악영향을 끼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작가 자신이 피지배층의 신분으로 지배층의 논리를 대변했다는 점에서 그 비난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타자가 금기로 설정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포기하고 다양성의 이름으로 외면하는 것도 혼종성의 관점에서 볼 땐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 섞임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오히려 서로의 간극을 더 벌려주고 갈등의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이런 Rushdie에 대한 비판은 그의 묘사의 모독성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그 이면에 숨어있는 비판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 일부다처제, 여성 차별, 돼지고기로 대표되는 현실에 대한 종교의 간섭의 범위에 대한 문제 제기 같은 이성적인 논쟁거리를 수면위로 이끌지 못하고 유독 작가의 표현의 모독성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그리고 Satanic Verses는 같은 현상·대상을 다르고 낯선 표현으로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문학 작품으로서 인식도 함께 고려되어져야한다. 그런 바탕아래 Rushdie의 선정적 묘사와 작품의 총체적 의미 사이의 연관성이 합당하게 부합되었는지를 비평하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지브릴의 꿈을 묘사한 부분과 참자의 변화 사이의 모순적 간극은 복잡하고 섞여가는 이 세계에 대한 이미지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Rushdie의 애증이 교차하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천당이나 지옥 같은 신들의 세계는 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약하고 변질되지만 흡수력 있고 끊임없이 생산적인 인간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계층에서의 자기비판이 다른 계층으로부터의 비판보다 더욱 강한 호소력과 객관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물론 Rushdie는 영국 유학 등 서방에서의 그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이슬람 세력의 한사람으로서 자기비판을 했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14살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던 사람으로 이슬람 문화를 그의 정체성의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언제나 어떤 현상 혹은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논리 밖에 서야만 그 비판할 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독재 정권치하의 있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정권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처럼 어느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양쪽 혹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새로운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혹은 대상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다는 주장은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Rushdie같이 혼종의 인물들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한 시대의 흐름에 있어서 앞으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가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관계 같이 골이 깊은 종교 문제나 좌익, 우익 같은 정치·이데올로기적인 오래된 갈등, 그리고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제국주의적 역사의 오점에 대해 새로운 혼종의 인간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낙관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권력의 힘, 즉 굴절은 워낙에 강력해 새로운 혼종의 인물들까지 어느 한편에 설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Rushdie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들은 굴절들의 세력 확장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대변해준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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