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은 어렵고 고상해 보이는 철학을 우리 눈높이에 맞게 옮겨 놓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작가는 세 편의 소설과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고독을 철학적 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철학책들은 매우 난해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난해함은 충분히 그 존재 이유를 지녀왔고 또 그것이 오늘날의 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이런 난해함에만 몰두해 대중과의 소통을 게을리 하면 철학은 극히 소수의 고상한 학문으로만 머물 것이다. 그래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이라는 이 책이 학계와 대중의 연결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요약

철학은 고상하고 범접하기 힘든 학문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서 활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학문이다. 이런 학문을 우리는 통합적으로 접근해 나가야 한다. 이는 일기·말하기·쓰기의 한 묶음을 말한다. 그러나 철학의 설명보다는 삶의 이야기가 넘어서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철학의 그물로 걸러지지 않는 잉여를 찾아야만 새로운 사실을 만날 여지가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삶의 이야기에 접근하는데 작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모습을 묘사하는 일에 몰두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들 작품의 허구성은 오히려 사태의 재구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적극적이고 발견적인 특징인 것이다.

 

인간은 자살을 택하기도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는 고독이라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시험에 이해 비롯된다. 그래서 고독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실존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고독의 원인

문학작품은 주로 그것의 주제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삶의 실제적인 면모가 정태적인 사태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동태적인 사태라고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박민규 작가의 소설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는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그 주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고독이 발생하는 원인을 숨겨놓아 다른 문학작품과 일치점을 이룬다. 전반부에서는 들음으로서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으로서 주인공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 독자는 타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객관적인 보편성과 관찰자의 특수하고 주관적인 시선을 모두 충분히 고려해 그 고독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동정은 낯설음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고독을 유발하게 만들 수 있다. 동정을 말하는 자는 그 사태의 이해관계에 깊숙이 억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데 있어 무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동정을 당하는 자는 동정 속에 숨어있는 자신과 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느끼게 된다. 결국 이것이 고독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타인의 말을 통해 자신이 애써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현실을 다시 견고하고 고정된 객관화된 것으로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인공 나가 전반부에서 느끼는 고독의 원인인 것이다.

반면에 주인공 나가 후반부에서 느끼는 고독은 그 원인이 달라진다. 외로움은 보통 타자에 의해 비롯되는 소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타자를 적극적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기기도 한다. 여기서 타자는 타자가 아니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강함과 약함이 공존하는 인간 실존의 보편성을 지니는 타자는 나와 일치점을 이뤄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타자와의 밀착을 통해서 인간의 보편성이 일으키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로부터 떠난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절대적인 권력이자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평등한 문자의 물리적 가치를 불평등화 시킨다. 또한 작가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독자는 정리해야만 한다. 작가는 사태의 진행과 서술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매듭을 짓고 있는지 미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독을 통한 성장

우리는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현상 속에 숨어있는 본질을 꿰뚫어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고독이 가지는 진정한 의의를 생각해야한다. 우리는 고독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동적인 감정을 간과하기 쉽다. 고독한 이의 표면은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안, 불균형 그리고 혼돈스러운 국면이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이 고독 속의 불완전한 면이 또한 성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선택에 대한 불확실이 또한 주체를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은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이다.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그리고 태어나고 그 이후에 갖는 관계 또한 일방적인 면모를 지닌다. 그래서 그런 일방성에서 빚어질 수밖에 없는 거리가 고독을 유발하게 만든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소설은 이런 고독의 원인인 거리를 좁히려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로빈슨은 무인도에서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 고독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는 런던, 스페란차를 통해 고독에 입문했고 마침내 화약통의 폭발로 인해 그 고독을 졸업하게 된 것이다. 이제 로빈슨은 사물을 자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서 인식한다. 타자는 나의 반영물이 아니라 독립되어 있는 존재이고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다. 이것은 밖에 있다라는 어원을 지니는 존재한다(Exister)라는 단어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타자는 자신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의식을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비유한 것처럼 내가 모르는 나는 빙산의 일각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타자라고 지칭한다.

문명이 인류에게 쥐어준 합리주의라는 헤게모니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런던에서의 로빈슨은 그 합리주의 횡포에 저항하지만 무인도 갇힌 그는 합리주의의 수호자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굴복할 수밖에 없는 스페란차라는 타자의 존재에 의해 그는 자신의 오만을 깨닫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 마침내 로빈슨은 세속의 문명 생활에 퇴색된 인간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였다.

· 고독과의 숨바꼭질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훤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찍이 프로이트가 지적하였듯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심리 활동에 의해 인간의 감정은 통제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통제된 감정도 어느 순간 행동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다. 영화 <레옹>도 이런 경우를 보여준다. 주인공 레옹은 마틸다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외로움을 마틸다를 구해주는 행동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 그런 자각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킬러로서는 꿈꿔서는 안 되는 인간상에 다가서게 된다.

 

외로움은 다른 감정들과는 특별히 유별난 구석이 있다. 다른 감정들은 그것의 대상에 직접적으로 반응하고 달려나지만 외로움은 그것의 원인을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외로움은 내면에 자연스럽게 숨겨지는 감정이다. 결국 이런 외로움과 관련된 숨바꼭질을 한탄조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레옹처럼 지금 당장의 행동에만 몰두한다면 과거의 외로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의 외로움은 현재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황혼녘에 되어서야 날개를 펴는 올빼미처럼 나에게 진짜 외로움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가능성으로 대상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그 인간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는 예측 불허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타인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움직임은 반성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인간만이 태도를 결정하는 데서 어려움을 수반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새로운 호흡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한다. 이것은 동물이나 사물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지옥을 만들 수도 있지만 천국을 만들 수도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처럼 인간은 치명적인 매력의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고독한 킬러인 레옹이 다시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게 한 이유인 것이다.

 

· 인간 이상의 사물

극한 고독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일시적이라도 그런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때로는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도 인격을 부여해 자신의 친구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그 사람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일 뿐이다. 그 사람의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과 사물의 부자연스런 관계는 해체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가 사람의 일방적인 욕구로 빚어진 거 외에도 다른 요소가 작용했다면 그 양상은 다른 면모를 띄게 된다. 이제는 사람 주도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사물과 사람 사이의 쌍방향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외로움이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필사(必死)의 존재에 기인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이 순간을 아낌없이 서로를 찾는 데에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처럼 오직 홀로 남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인간의 그런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을 찾는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척은 한낱 배구공을 친구로서 인식하기 시작하고 결국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까지에 이른다. 그러나 윌슨은 척의 현재의 고난을 달래주는 일시적인 노리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척이 뗏목으로 탈출을 감행했을 때 윌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행위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왜 척은 윌슨을 자신의 목숨만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타인은 어떠한 의미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타인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최후의 시험대이며 보루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타인을 찾는 것은 외로움이라는 욕구로서 쉽게 설명되어지지만 이런 욕구의 근원적인 원인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척도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현재 상황에 굳건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인정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타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배구공 윌슨은 그에게 친구이자 은인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주위 환경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이루지 못할 때 결국 사물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과 윌슨의 관계는 그런 경우에서 빚어지는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척은 윌슨에게 생명을 부여하였고 윌슨을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또 다시 윌슨에게 생명을 부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과 사물의 극진한 소통은 사물이 지니는 무지막지한 포용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포용성은 외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매력적인 탈출구가 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인간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이자, 소극적 자유라는 비판이 있지만 사물의 말없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아닌 것과의 소통은 때로는 인간과의 소통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데 급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고통을 떳떳이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칼로의 그림 <부서진 척추>에 등장하는 여인과 같이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이런 드러냄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냄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보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지하 생활자에게서 그 의미의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40년 동안 지하에 홀로 갇힌 생활을 하였지만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에 대해 쓰는 행위를 통해 고독하지 않은 것이다. 그 쓰기를 유발한 것은 홀로라는 그의 상황이다. 흔히 홀로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유발할거 같지만 그 주체에 따라서는 완전한 자신과의 합일을 이루게도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런 합일이 자신의 치부에 당당히 맞서게 만든다. 그런 당당함은 필연적인 아픔을 수반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일뿐인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아픔은 이제 밖으로 밀려나와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당당함의 수단이 쓰기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쓰기는 읽기와 달리 쓰는 이로 하여금 더욱더 적극적인 의지와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하 생활자는 쓰기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시간에 완전히 몰두해 고독을 느낄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라는 시간은 그 주체에게 시험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을 직시해서 자신의 비겁함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대로 진실한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을 격리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벽면 수행을 하는 수도사들이나 자신의 내면 깊숙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들을 그 예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그런 방법들이 꼭 진정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는 물질적인 고독과 정신적인 고독은 꼭 합일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홀로의 환경을 갖춘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타이의 시선은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나태해지려는 욕구를 견제하는 일종의 시험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동양의 사상들은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의 사상들은 타인의 시선을 허구적인 욕망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라깡은 타인의 욕망은 자기의 움직임을 결정한다.”라고 말함으로써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왜곡을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사상은 서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행동한다는 점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눈길에 상관없이 스스로 삼가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의 지하생활자도 다른 사람의 관심에 상관없이 스스로 욕망한다. 그들은 스스로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마침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게 된다.

 

· 고독의 이중성

서양철학에서 고독은 중세 이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고독은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격 완성을 위해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특히 헤겔은 고독을 사회적 규범에서 한 발 물러나 자기의 참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형식으로 규정하였다. 반면에 현대 심리학과 사회학에서는 고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들 학문의 학자들은 고독을 사회적 관계에서 이탈하여 고립화된 병적인 상태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관계의 이탈을 구조적인 것으로 보아 현대인의 고독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 말하는 고독과 사회학에서 말하는 고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회적인 네트워크 밖에서의 인간을 설명할 수 여지를 사회 과학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철학은 인간이라면 원초적으로 주어지는 관계의 끊어짐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다시 말해서 그 끊어짐이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정당성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추구의 완성을 형이상학적인 고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인 고독과 대비되는 것으로 일상적인 고독이 있다. 이것은 일상에서 자기와 타자를 연결하는 끈을 찾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런 불일치는 오히려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생산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와 타자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고독과 일상적인 고독 외에 다른 고독은 인간을 위태롭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것은 앞서 얘기한 사회학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고독인 것이다. 하지만 경험하기 이전에는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고독이 약인지 병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독에 빠져봐야 한다.

by 그루브21 2014. 7. 23. 11:14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을 사람들과의 토론을 거쳐 글쓰기로 이루어져야 자기 자신의 생각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읽지 않고는 토론이나 글쓰기를 할 수 없다.

-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외)
by 그루브21 2013. 6. 2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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