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보인 모든 태도 하나하나가 이제는 전부다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삶은 어떤 기나긴 재판입니다.’

 

그는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 모든 사물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단하고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다. 왜냐면 그런 가치 판단 없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당위성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삶의 의미의 부재로 연결되어 허무주의적 사고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가치 판단의 기준이 또 다른 가치 판단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치 판단을 수행하는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외적인 형식을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의미의 척도로서 오해를 하기도 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에겐 살인은 하나의 증폭제 일뿐이다. 물론 증폭제 일뿐이지만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에 대한 해석은 표면위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살인이라는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살인으로 표면화된 해석이라는 특성이다. 뫼르소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황에서도 슬퍼하지 않는 패륜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뫼르소가 어머니의 시신을 보려고 하지 않고, 어머니의 나이도 제대로 기억 못하고, 밀크 커피나 찾는 모습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기본적인 인간의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해석은 그의 살인이라는 행위와 연결되어서 뫼르소에게 사형이라는 또 다른 살인과 연결되게 만든다. 사실 뫼르소는 표면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 스스로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는 개를 잃어버린 옆집 영감을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패륜아로서 해석이 살인과 연결된 것처럼 자기 자신도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의 부재의 혼돈이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이 작가가 뫼르소에게 해주고픈 해석이 아니었을까.

by 그루브21 2014. 1. 2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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