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루시디(Salman Rushdie)악마의 시(Satanic Verses)란 작품에서 인간의 본질의 영원성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인간의 본질은 변화할 수 있다는 루크레티우스와 인간은 외형만 바뀔 뿐 그 안의 본질은 불변하다는 오비디우스의 대립을 말한다.(악마의 시 402쪽 참조) 하지만 대립되는 이들의 논쟁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인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유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오비디우스도 외적이지만 변화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너무 현학적이라 무의미하게까지 보이는 루크레티우스와 오비디우스의 논쟁보다는 그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간의 유동성을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될수록 그 초점이 주체성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됨을 알 수 있다. 20세기 들어오면서 주체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비평 사조와 역사적 사건에 따라 같이 변화하였다. 20세기 초반에는 빠롤(parole)을 경시하고 랑그(Langue)를 중시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출현으로 개인 주체의 자신감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 위축은 더욱 극에 달하는 듯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에 비참한 현실에 좌절하여 사회 역사적 맥락을 외면하고 개인의 내면적인 측면에 몰두하는 모더니즘의 출현과 기존 경계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에 의해 개별 발화인 빠롤, 즉 개별적인 발화는 다시금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1980년에 나온 브라이언 프리엘(Brian Friel)의 번역(Translation)이란 작품은 어떤 의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작품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화 하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이다. 하지만 번역이 다른 피식민지 리얼리즘 문학보다 돋보이는 점은 이 드라마가 제국주의라는 사회·역사적 맥락에만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 안의 인물들에 자율성과 다양성을 부여해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전체적으로 정해진 틀은 존재하지만 그 틀의 구성원들에게 즉흥연주(improvisation), 즉 자유를 허락하는 재즈와 같은 유사하다. 그러나 그 음악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각각의 연주자들이 아무리 자유롭고 화려한 연주를 하더라도 서로의 관계가 조화롭지 않다면 그 연주는 시끄러워지고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리엘의 번역 안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조합이 얼마나 적절히 이루어졌느냐가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중요하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도 독자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

 

욜랜드 : 1789년 태생이시지요.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바로 그 날입니다. 나는 그것이 아마도 저의 부친의 인생을 결정지었을지 모른다고 종종 생각한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지 않나요? 부친께서는 태어나신 바로 그 날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으신 거죠-혁명 제 일 년이었으니까요. 옛 시대는 끝이 났던 거죠. 세상은 오래된 껍질을 벗어 던졌던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에 이제 더 이상 한계도 없었던 거죠. 무한한 가능성이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때였구요. 아버님은 여전히 믿고 계시지요. 계시는 이제 곧 나타난다는 거지요.... (번역, 155p)

 

욜랜드의 아버지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났다. 그는 피지배 계층에 의해서 왕족, 귀족, 종교의 지배 계층이 전복되는 시대에 태어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억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반세기 가까이 지나도 그런 희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사회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지배 관계를 형성하는 중이었다. 결국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봉건적 지배 체계와 그 이후의 근대적 지배 체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상하 관계로 보았을 때에는 별반 다르지 않은 계급 체계일 뿐이고 그 구분의 기준이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는 세상은 오래된 껍질을 벗어던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이름만 바뀌고 몇몇 낡은 것을 버렸을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착각에 빠져든 걸까? 그 이유는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의 특성에 대한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실제 존재 조건으로의 개인들과의 상상적 관계의 재현이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소유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로서 개인들을 호명한다.”(Literary Theory : An Anthology, Julie Rivkin and Michael Ryan : Blackwell, 2004)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소수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가 투영된 도구로 보았고 그것은 물질적 존재, 즉 학교, 종교, 미디어 매체, 군대, 경찰 등에 나타나게 하여 결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주체들을 대량 생산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욜랜드의 아버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원래 부르주아만의 이데올로기였지만 물질적 존재를 통해서 욜랜드의 아버지마저도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주체로 고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물질적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제시되어있지 않지만 벨리 벡의 경우를 통해서 프리엘은 그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영국이 기존의 노천학교를 대신하는 국립학교를 세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주입하려고 했던 것도 알튀세가 말하는 물질적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욜랜드 아버지나 벨리 벡 마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시도들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 시도의 양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는 랜시 대위를 통해서 잘 표현된다. 그는 또한 알튀세가 말하는 물질적 존재인 군대에 종사는 인물로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다. 게다가 군대는 경찰과 마찬가지로 학교, 종교, 미디어 매체와는 다른 종류의 물질적 존재이다. 후자는 피지배 계층을 스스로 지배 계층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전자는 그 목표가 실패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강제적인 장치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욜랜드가 실종되고 매너스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때 랜시는 군대의 힘을 통해 즉각적으로 벨리 벡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을 경고한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욜랜드의 아버지와 랜시 대위를 통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피지배 계층이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에 쉽게 포섭된다는 것을 단지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론으로만 설명하려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배 계층의 입장과 방법에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에 피지배계층에 대한 연구도 중요해지면서 그들의 나약함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항상 무엇이 되고자 한다. 단지 살다가 죽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영원히 기억되기를 열망한다. 그렇지만 인간 본연의 그 욕망은 지배 계층의 욕망과 잘못된 만남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욕망들이 합쳐져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어떤 것이 나의 것이고 어떤 것이 타자의 것이었는지를 구별할 수가 없다. 결국 그렇게 합쳐진 자아는 또 다른 용도를 위해서 이용당해지는 것이다.

 

3. 가장 무거운 짐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12p)

 

니체(Nietzsche)는 인간의 삶을 영원한 반복으로 규정지으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크나큰 숙제를 남겼다. 인간의 모든 삶이 결국은 삶과 죽음, 즉 만남과 헤어짐의 영원한 반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긍정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니체가 인류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부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가장 무거운 짐 위에서 찬란한 가벼움의 삶을 사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쿤데라가 인간의 인생을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교차시켜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쿤데라의 해석으로 프리엘의 번역의 인물들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번역에서 휴와 지미는 벨리 벡에서 지식인으로서 지도자 계층에 속한다. 휴는 욜랜드에게 게일어가 아일랜드 현실에 대한 굴절된 결과이고 그것으로 의해 또다시 아일랜드 현실이 굴절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또한 오웬에게는 언어가 역사적 사실들보다 중요하고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드는 일을 멈추면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서 그가 단지 지식뿐만 아니라 통찰력도 뛰어난 학자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지미 또한 욜랜드를 그리워하는 메어에게 엑소가메인이라는 말로서 서로 다른 공동체가 평화롭게 화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학자다운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모순적 태도로 인해 그들의 통찰력은 공허함을 배가시킨고 있다. 휴는 결국 그들의 언어를 새롭게 하는 만드는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결국 휴가 영국의 제국주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당한 논리로 현재의 옳지 못한 주장과 자신의 비겁함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미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아테네 여신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내지만 사실 이는 그가 단지 얘기할 사람을 찾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감추는 언행이었다. 휴와 지미가 이런 공통점을 보이는 것은 결국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부족은 1798년 그들의 비겁함에서 비롯된다. 휴는 1798년 그들의 도망을 피에타스(pietas)라는 단어로 무거움을 억지로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반세기 동안의 시간이 그에게 부여하는 무게에 비하면 그때 그 행동은 얼마나 가벼웠는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휴는 아직도 1798년의 혼동에 의미부여를 안하면서 그 무게를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휴의 아들 매너스 또한 벨리 벡 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현실로부터 도망을 쳐 자신의 아버지가 걸었던 도피의 길을 다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반면 도알티와 브리짓은 학식은 부족하지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맞서는 민중들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특히 도알티는 시대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억지로 무거움을 주입하지 않는다. 그는 영국군과는 힘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과 싸울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정의는 결과를 중요치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알티가 계속 자신을 지켜나갈지 아니면 휴나 지미, 그리고 매너스 같이 자신을 포기하는 선택을 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인간의 인생은 이러한 선택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되어진다.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 없고 또한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하여도 영원히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오웬이 지명부를 외면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인생의 유동성을 대변한다. 그래서 그 무한의 무거운 세상에서 끊임없이 긍정의 세계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이다.

 

4. 자기되기

 

욜랜드 : .... 내가 아버님께 커다란 실망을 안겨드릴까 두려워요. 난 그 분이 지니신 에너지도, 일관성도, 혹은 믿음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내가 운명을 믿어서 그런 걸까요? 내가 벨리벡-아니, 발루 벡-에 도착하던 그 날,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던 그 순간, 난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지요. 그건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요. 그건 순간적인 발견 인식이랄까. 아니-완전한 발견 인식이 아니라-내가 반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어떤 것을 인식하고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마치....내가 발을 내디딘 것처럼. (번역, 155p)

 

욜랜드는 아버지와 심어준 외부의 자아와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내부의 자아 사이의 갈등을 겪고 있다. 그는 착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른다. 부친이 시키는 대로 동인도 회사에 취직해서 뭄바이에 있으려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 이곳 벨리 벡에 온 것이다. 하지만 욜랜드는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그는 아버지와 갈등이 두려워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을 외면한다. 결국 욜랜드는 자기되기에 실패한 것이다. 철학자 유헌식은 자기되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되기는 보수적이고 관성적인 진행을 거스르는 행위다. 타인의 욕구에 대해 일일이 그것의 타당성을 물어 내가 왜 이것을 따라 해야 하는가?’를 냉정하게 되묻는 행위다. 자기에게 확실하다고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순간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 휴머니스트, 2007, 141~142p)

 

유헌식의 표현에 따른다면 욜랜드는 보수적이고 관성적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타당성을 묻는 행위가 결여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완전히 고착화되지 않은 유동적 가능성의 존재이다. 그것은 벨리 벡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그 첫 만남에서 무언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동시에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포용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 같은 불완전한 존재는 또 다른 외적인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이 외적 요인은 자신의 내적 요인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작품에서 그것은 벨리 벡이라고 할 수 있다. 게일어, 마을 풍경, 친절함, 그리스·로마 신화와 아일랜드의 신화의 혼종, 토바르 브리 그리고 메어에 의하여 욜랜드는 자신의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억압되었던 자신을 스스로 풀어주어 본래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이는 오웬이 토바르 브리에 의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만약 욜랜드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을 단지 번역이라고 자신을 속이며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5. 결론

 

문학은 시대의 흐름, 모순, 소명을 여과 없이 반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대중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그들을 미래로 이끄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이 그런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이택광은 그의 강의 문화비평의 페다고지에서 그것의 예로 이문열을 예로 들었다. 이문열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금시조같은 작품에서 그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집중함으로서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지만 그 이후 이문열은 점점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만 작품에 주입하기를 고집해 결과적으로 그의 문학성은 퇴보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프리엘의 번역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우선 프리엘은 아일랜드라는 피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치우침을 최대한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표현되고 있지만 초점이 그것에만 매달리지 않고 제국주의의 의해 굴절된 다양한 인간상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피식민지 국민뿐만 아니라 식민지 국민의 굴절까지도 차분하게 제시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끝난 직후가 아니라 삼십 여년이 지난 20세기 말의 시대적 관용이 이제는 식민지의 주체에게까지도 개인성을 인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프리엘은 인간을 변화하는 요인으로서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 사이의 치우침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이는 아직도 논쟁중인 개인을 사회적 맥락의 약자로 보는 맑스주의와 개인을 왜곡된 자아로 보는 라깡주의의 끝없는 논쟁을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리엘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어 무한히 엇갈리는 인간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비록 넬리 루우의 아기는 세례식을 받자마자 경야를 치르게 되는 것처럼 벨리 벡의 미래는 매우 암울해 보이지만 도알티로 대표되는 배운 것은 별로 없지만 떳떳하고 정의로운 민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메어가 현실의 무거움을 못 이겨내고 구원자를 찾지만 오웬은 자신만의 이익을 버리고 다시 무거운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태어남, 절망과 희망은 언제나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엇갈림은 망각이라는 존재 안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로마가 잉글랜드처럼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망각된 것처럼 넬리 루우의 아기의 죽음이라는 아일랜드의 절망도 망각될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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