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조선 시대 농민들은 탈춤이라는 열린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억압된 현실을 일시적 망각의 세계에 가둬두려 했다. 그들은 양반을 개잘량이라는 량() 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 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다.”라고 조롱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했다.(봉산 탈춤 제6과장 말뚝이 대사) 그러나 이는 지배 계층에 의해 암묵적으로 허락된 일탈이었다. 이에 대해 바흐친(Mikhail Bakhtin)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rands annales tresueritables des gestes merveilluex du grand Gargantua et Pantagruel)이라는 작품을 통해 억압적인 봉건 질서 하에서 민중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욕망을 어떤 방법으로 분출하고, 또한 민중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지배 계층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어지는 지를 논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흐친은 피지배계층에게 일시적으로 계급적 구조의 전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지배계층과 현실 세계에 대한 불만을 스스로 조절하게 해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Literary Theory : An Anthology (Blackwell, 2004) Chapter 9 : Rabelais and His World (Mikhail Bakhtin)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리처드 2(Richard )라는 희곡은 그런 의미로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신과 동등한 위치인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탐욕과 두려움과 같은 나약한 모습을 또한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왕의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이런 해석을 넘어 좀 더 다양한 측면으로 이 작품에 접근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의 모습만으로 작품의 전체를 해석하게 만들어 리처드 2세가 함유하고 있는 전체 메시지(message)에 접근하지 못하고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리처드 2세는 1595년도의 작품으로 튜더왕조(House of Tudor)의 마지막 왕인 엘리자베스 1(Elizabeth)의 시대에 나온 작품이다. 튜더 왕조는 랭카스터(Lancaster) 가문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 왕조로서 작품에서 등장하는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의 반란과 시작을 같이한다. 물론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이후의 헨리 7(Herny )를 튜더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삼고 있지만 리처드 2세에 대한 볼링브로크의 반란이 그 이후의 왕위 다툼과 새로운 왕조의 설립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 작품은 리처드 2세를 패자로 인식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런 16세기 말의 이데올로기(Ideologie)가 작품에 영향을 미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될 수 없듯이 그 인간의 창작물인 문학 작품도 역시 그 시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또한 이런 일반론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 작가와 시대 사이의 의존적인 관계는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 시대의 흐름으로 작가의 복종이라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 2세를 비롯한 모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지금의 TV 드라마와 같은 당대 영국 사회의 대중 예술이었다. 이는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을 통해 잘 드러난다. 셰익스피어가 속한 극단의 본거지가 되었던 글로브 극장은 비록 좌석은 따로따로 되어 있긴 하였지만 농민부터 귀족까지 함께 어울려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열린 공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하에서 그 공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 계층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요구되어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웃음으로 집약되는 가벼움이었다. 그래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리처드 2세도 인물들의 희극적인 대사가 작품 전반에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도 새롭게 평가받는 시대를 초월하는 작가가 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당대의 보편성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대중적인 보편성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보편성을 숨겨놓는 작가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희곡이라는 문학의 틀에서 그것만이 가지는 특징을 잘 살려내었다. 문학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묘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지각이 너무나 자동적이기 때문에 예술은 그 지각을 지체시키거나 적어도 주위를 환기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발전시킨다.”(Victor Shklovsky.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Lee T. Lemon and Marion J. Reis: th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65. 4p 번역 인용)라고 말한 쉬클로브스키와 같이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드러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는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겉에 나타나는 이야기 속에 은밀히 심어놓은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권력 투쟁의 장으로서의 사극

사극(historical drama)이라는 장르(genre)는 작가 자신의 예술성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식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고 또한 실제의 인물들을 표현해야하기 때문에 다른 장르보다는 그 표현으로 비롯되는 이해관계가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해관계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서 객관적인 사실조차도 상반되는 사실들로 분열시키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측면이 보이듯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고정된 사건을 각각 다르게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들은 죽어있는 존재지만 타의에 의해 현재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는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 현재의 사람들은 끊임없는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역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박정희 정부 시대의 이순신에 대한 작품인 성웅 이순신(1971)’난중일기(1977)’를 보면 카리스마(charisma) 넘치는 지도자상이 잘 나타나 있다. 반면에 노무현 정부 시대의 그에 대한 작품인 불멸의 이순신(2004)’을 보면 보다 인간적인 개혁자의 모습으로의 확연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당대 집권 세력의 이해관계가 작품에 은밀히 투영된 결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마이데일리 기사 참조(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대 시대의 보편성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

 

리처드 : 좋은 질책이오. 오만방자한 볼링브로크, 내가 간다

우리 운명 판가름할 날 위해 네놈과 한판 겨루려.

이 오한처럼 온 두려움은 날아갔다.

스스로 갖는 두려움 이기는 건 쉬운 노릇

.... 하늘에 맹세코, 내게 더 무슨 위안을 찾으라

말하는 자 있으면, 나 영원히 그를 증오할 거요.

플린트 성으로 갑시다. 거기서 나 죽을 거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 이성일 역 : 나남, 2011. 106, 107p 인용)

 

리처드 2세가 타자에 의지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사이다. 그는 다른 이의 조언에 이끌려 볼링브로크와 대적할 용기를 얻기도 하고 자살하고픈 실망을 얻기도 한다. 결국 그는 왕으로서 신적인 존재가 되기는커녕 주위 신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변덕스런 인간상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약함을 몸소 고백하고 있다. 더군다나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수다스럽고 감정적인 리처드의 화술은 그의 나약한 모습과 함께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왕으로서 너무나 부족한 리처드의 모습은 극의 초반부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브레이(Mowbray)와 볼링브로크의 다툼에서 그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만 것이다. 리처드는 그 둘을 동시에 추방함으로써 자신의 죄의 공범자와 잠재적 반역자를 동시에 제거하려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선택은 공범자가 아닌 충신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볼링브로크를 잠재적 반역자에서 실재적 반역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의 선택을 최악의 방향으로 바꾸어 버렸는가? 리처드는 자신의 입지를 불안해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왕이라는 위치는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위협 불가능한 자리라고 외쳐대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빼앗길 수 있는 인간의 자리라고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불안함 때문에 떳떳치 못한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의 죽음을 숨기려 했고 미래의 적을 제거해 자신의 자리가 확고하다는 확신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이런 불안함은 조급함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아일랜드의 반란 때문에 급하게 군자금이 필요하게 되어 또 다시 볼링브로크를 부당하게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은 이 결정이 직접적으로 리처드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셰익스피어의 서술에는 명백히 드러나진 않지만 리처드는 약해진 왕권의 희생자인 것이다.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 볼링브로크, 아일랜드로 이어지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들 속에서 진정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리처드의 불안함은 볼링브로크에게도 똑같이 이어진다. 볼링브로크는 반란을 완벽히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그 성공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는 패배한 리처드를 만나도 신하로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물론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또한 그가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랜 시간동안 내려오는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볼링브로크 역시 약자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무능한 왕을 처단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엑스턴이 리처드를 살해했을 때 그의 비겁한 모습은 더욱 더 잘 드러나게 된다. 리처드가 모브레이를 버린 것처럼 그는 엑스턴을 이용만하고 엑스턴이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결국은 리처드 2세나 헨리 4(Henry )는 비슷한 왕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왕권이 약화된 시대에서 불안하고 유약한 왕으로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표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셰익스피어는 시대가 요구하는 패배자 리처드를 넘어 승리자 볼링브로크까지 아우르는 시대의 보편적 왕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3. 무비판적인 인간들

20세기 초·중반의 문학 비평 사조를 지배하였던 신비평(new criticism)은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데 있어 좀 더 객관적 기준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 객관적 기준은 다름 아닌 문학 작품, 텍스트(text) 그 자체였다. 그래서 사회·역사적 맥락과 작가에 대한 성향에 의해 비롯되는 과도한 작품 해석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평주의자들이 그런 주장을 펴는 내막에는 이것과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신비평을 신봉하는 인사들 대부분은 부유한 미국 남부 출신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이었다. 그래서 현 상태의 유지를 바랬던 그들은 문학 작품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의 현실 참여를 필요치 않을 정도로 그들은 현 상태의 계급 구조의 유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의 대립으로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적과 아군으로의 이분법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강요된 선택에 대해 그들은 이기적인 중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그런 그들의 중립은 그 시대의 지배적 입장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입장은 자신의 이익과 보존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부합되는 보편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런 행위가 16세기 후반의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요크 : ....내 고백하건대,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으니,

내 군세는 약하고 오합지중인 때문이다.

허나, 내 할 수만 있다면, 내게 생명 주신

하느님 앞에 맹세코, 내 그대들 모두를 체포하여

전하의 자비를 간원코자 무릎 꿇도록 하였을 터.

허나, 내 그리 못할진대,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중립을 지키겠소. 하니, 잘들 가시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 이성일 역 : 나남, 2011. 90p 인용)

 

요크 공작(the Duke of York)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곤트(Gaunt)가 죽자 리처드가 추방된 볼링브로크의 권리를 부당하게 취하려고 하였을 때도 요크는 그 불의를 참지 못하고 왕에게 직언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용기가 부족해 위선적인 면모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요크는 왕에게 그런 직언을 했을 때조차도 계속해서 주저하고 있는 중이었고 결국은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바로 그 상황을 피하고 만다. 그리고 볼링브로크의 반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사태에까지 이르자 그는 중립이라는 영악한 단어로 자신의 행위의 비겁함을 본격적으로 숨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볼링브로크에게 굴종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원리원칙을 말하고 있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이는 그가 리처드에게 보였던 행동가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그에게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이란 자신의 보존이 가능할 때에만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중성은 마침내 자아가 뚜렷이 분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승자와 패자로 결정되어 런던으로 돌아오는 볼링브로크와 리처드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요크는 비록 볼링브로크의 지위와 영예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리처드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목이 메는 행동으로 그 정도를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오멀이 역모의 일원이 된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다시 급박한 상황으로 몰리자 자신의 존속을 최우선으로 하는 요크 내의 자아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아들의 행복을 바라는 본능적인 아버지의 속성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볼링브로크에게 저놈을 살려 두는 건 날 죽이는 것이니, 그리하면, 역적은 살려 주고, 충신은 죽이는 것이오.” (셰익스피어, 168)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요크는 겉으로는 명예롭고 정의로운 척하나 속으로는 자신만의 이익과 생존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칼라일(Carlisle) 주교는 그런 요크가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리처드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볼링브로크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다고 공표되었을 때조차도 이 일의 부당함을 당당히 외친다. 그는 봉건적 세계(fuedalism)의 몇 안 남은 수호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볼링브로크 앞에서조차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위험을 빠지게 하는 모험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볼링브로크를 흉측한 대역 죄인이라고 선포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단단함이 그를 살려놓게 된다. 볼링브로크는 그에게 고매한 명예의 불꽃을 내 그대에게서 보았노라.” (셰익스피어, 185)라고하며 역모로 잡힌 그를 살려준 것이다. 요크는 승자의 편에 살아남았지만 명예를 지킬 수는 없었고 반면에 칼라일은 패자의 편으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명예는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칼라일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은 부족했다. 그는 시대의 소명이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왕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왕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읽지 못했다. 결국 그는 구시대가 심어준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맹목성은 요크의 재빠른 처세술과 대비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비슷한 특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크는 당장의 권력 흐름에는 민감하지만 전체적인 시대 흐름에는 칼라일과 마찬가지로 둔감했던 것이다. 그런 맹목적인 인물은 시대의 변화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4. 결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가 인간의 단계로 추락하는 왕이라는 소재를 다루고는 있지만 근대적 문학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으로 촉발된 근대 사회의 근원은 16세기 말의 영국 사회에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대에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직까지 그 당시의 사람들은 신 중심의 봉건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리처드 2세의 텍스트(text)를 보면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는 세계관을 가지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봉건적 질서와 근대적 질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몇몇 군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결국 이 작품을 근대 문학으로 오해하기 만들기 쉽게 하는 표면적 요소는 앞서 언급한 바흐친의 카니발(carnival)적 요소와 왕권 약화의 시대적 요인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왕위 다툼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단지 시대적 요구에 그대로 부합하여 작품을 쓰지 않고 그 행위의 밑바탕에 숨어있는 인간의 내면을 파헤쳐 중세(Middle Ages) 문학 이상의 것을 창조해 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로인해 그는 영국의 르네상스(Renaissance)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근대 문학의 교두보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로 하여금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핵심적 요인은 당대 시대의 요구와 대중들의 요구에 쉽게 타협하지 않는 작가 정신이었다. 모든 현상을 의심하고 그것의 근원까지 분석하려는 그의 인문학적 작가 정신은 지금 현재의 시대에도 유효한 지향해야 마땅한 정신이라 하겠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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