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르 귄(Ursula k. Le Guin)의 단편 소설 ‘이슬락에서의 포리지’(Porridge on Islac)는 그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공상 과학 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의 초점은 공상 과학 소설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나 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나 과학에 의하여 빚어지는 사회 현상과 인간들의 삶의 변화에 집중되었다. 이는 문화 인류학자였던 그녀의 아버지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문화 인류학은 특정한 문화를 지닌 인간 집단의 생활상을 연구함으로서 그에 따른 문화적 현상이나 사회 체계의 작용과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학문(문학비평용어사전 참조)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르 귄에 대한 아버지의 영향에 대한 평가를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르 귄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문화 인류학의 연구 소재 같은 특수한 개체나 집단을 소설의 소재로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특수한 소재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의 삶에서의 문제와 비슷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이슬락에서의 포리지’도 그녀의 작품의 일관적 주제와 큰 틀을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슬락에서의 포리지’의 텍스트 안에서 화자가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Ai Li A Le를 만났는데 그녀는 자기들은 과학과 공학 모두를 좋아하지만 자기들은 좋은 기술자이지 좋은 과학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또 화자가 그녀의 말을 요약해서 그들은 에디슨과 포드는 있지만 다윈과 멘델은 없다고 다시 말하고 있다. 이 단편 소설에서 말하는 과학과 공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에디슨과 다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공학은 과학의 하위 개념인가? 혹은 공학은 과학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서로의 독립된 영역을 가진 별개의 개념인가? 과학자와 공학자 혹은 기술자의 정의는 그 시대, 지역, 말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변화를 살펴보면 르 귄이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Ai Li A Le가 자기들이 좋은 기술자이지 좋은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을 할 때에는 독자는 이 말이 부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 물고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녀의 딸 이야기가 나올 때 그런 부정성이 극에 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가 말하는 이 부정성의 근본 원인은 유전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실제로 이 텍스트도 시작부터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잘 조작된 Teddy Bear 이야기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먹는 음식(Maize)이 자신의 몸의 구성 성분중 하나인 Ai Li A Le 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전체적으로 유전적 조작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유전자 조작의 근원에는 Ai Li A Le가 긍정적 대상이었던 ‘과학자’ 다윈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유전학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유전학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 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전자 조작을 이행하는 능력의 향상이 결정론적 사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혹은 이런 결정론적 사고가 과거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단편소설의 흥미로운 대목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Ai Li A Le가 화자에게 자신들은 인간 유전자가 99.44% 이상인 자들만이 지적인 직업과 정부 관련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은 4%의 옥수수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웨이트리스로서 일하고 있다고 알리고 있다. 이는 독일이나 일본이 내세웠던 결정론적인 논리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녀의 세계가 말하는 논리는 나치즘이나 일본 제국주의 같은 인종 우월주의보다는 훨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면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유전자를 99.44% 이상 가진 자들이 그 이하를 가진 자들보다 뛰어나다는 논리가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유대인인의 전멸을 실행한 나치즘과 같은 타자에 대한 폭력성의 우려를 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래서 작가의 이런 묘사는 유전학의 발달과 결합된 새로운 인종주의에 대한 경고로서 이해가 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르 귄의 소설의 현실 세계와의 밀접한 관계는 공상과학 소설의 특이한 소재와 결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부여한다. 이는 공상과학 소설과 유사성을 보이는 판타지 소설에서도 흔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판타지 소설은 거의 공식화 되어버린 종족의 다양성을 통해서 단수가 아닌 인간의 다양한 군상을 좀 더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르 귄은 그녀만의 세계를 재창조해 현재 혹은 미래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는 소설에서 Teddy Bear를 묘사하면서 인간의 유전학적인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적용이 인간이 예상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원래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서 유전적 변이된 곰이 유전학자의 예상과는 달리 곰이 아이들의 책의 종이와 책에 쓰이는 접착제를 먹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을 작게 만들기 위해 써진 벌레의 유전자 때문에 곰의 모습도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곰은 Teddy Bear에서 Bearwig 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유전자적 변형에 의해 벌어지는 모습은 현재의 유전학의 모습과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광우병 같은 일도 이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광우병의 유전 인자로 알려진 프리온은 사실 정상의 사람과 짐승에 존재하는 정상적인 단백질이다. 그러나 이 프리온이 효소작용으로 인해 변형되어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면 주변의 정상적인 정상 프리온까지 감염성 프리온으로 만들어 광우병의 원인 물질이 된다. 다시 말해서 원래 초식 동물이었던 소가 동물성 사료를 먹음으로서 정상 프리온이 감염성 프리온으로 변이되 인간에게까지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이다.(시사상식사전 참조) 자연적 존재였던 곰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변형했지만 결과는 예상치 못하게 나온 것처럼 인간의 편이와 대규모의 소고기 소비를 위해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주는 행위가 또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를 빚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조작이 항상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이다. 육종(育種)을 통해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인류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비해 식량생산은 인구 증가에 따라가지 못해 인류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육종이라는 새로운 재배 방법으로 이런 위기를 헤쳐 나갔다. 육종은 종자의 교배를 통해 신품종을 개발하는 것을 뜻하는데 예를 들어 피망과 고추를 결합해 오이 맛 고추를 얻는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인류가 먹는 대부분의 과일과 채소는 육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육종은 이제 보편화된 재배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EBS 과학 대기획- 다섯 개의 열쇠 참조) 물론 유전자를 직접 조정하는 것과 육종과 같이 다른 작물을 교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는 결과론에 불가하다. 만약 유전자 조작이 육종처럼 인류에게 유익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면 그녀의 소설에서 Bearwig 같은 상징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이슬락에서의 포리지‘는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완결되지 않은 문제성과 깊은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단편소설은 당시대 혹은 그 이후의 시대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영향을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학문이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진행이 오래 될수록 학문 간의 배타성은 의도치 않게 함께 일어났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단절이 강화되어 각 분야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범위를 스스로 한정시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각 학문의 성취도가 높을수록 점점 특성화되고 각 분야의 연구의 질이 깊어지는 것은 인정되어지고 장려되어야 경향이지만 그 특성화와 전문화 안에서도 타학문의 도움이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단절은 학문의 범위의 확대나 질의 향상의 측면에서 저해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융합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는 것도 그런 단절에 대한 시대의 우려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융합의 패러다임은 과거 회귀적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 René)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합리주의 철학의 길을 연 사람으로서 알려졌지만 사실 그가 뛰어난 당대의 자연 과학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과학자 데카르트 (홍성욱, 네이버 캐스트)) 그는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라는 저서를 통해서 빛이라는 자연 현상을 그의 과학적 논리를 드러내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진리 추구를 철학이나 과학이라는 어느 한쪽의 범주에 한정시키지 않았고 그런 한쪽의 범주에 억매이지 않는 자유, 포용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유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철학이나 자연 과학의 측면에서 그를 보더라도 편협하지 않은 그 만의 사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락에서의 포리지’에서 나오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Ai Li A Le는 그들은 매우 무책임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녀는 과학자들에 의해 개량된 품종이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해 자신들의 기근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사람까지도 그들의 실험 꺼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심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물론 이는 그녀만의 생각인지 다른 사람과의 공통된 생각인지는 텍스트에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Islac이 전체적으로 깊은 경제적 문제에 빠져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녀의 생각은 단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그녀의 딸도 마찬가지의 추론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슬락의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무책임한 실험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자신의 정체성의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와 이슬락의 과학자들 간의 극한 평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지 결과론에 입각한 평가인가?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빛과 색에 대한 연구도 사실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논리가 맞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색이란 물체에 빛이 닿아서 생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뉴턴(Sir Isaac Newton),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에 의하여 빛은 전자기파와 같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결국 인류는 빛과 색에 대한 본질에 좀 더 다가서게 되었다.(EBS 다큐프라임 빛의 추적자) 하지만 데카르트의 연구가 실패하였다 해서 그의 연구가 전적으로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데카르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빛과 색의 본질을 탐구하고 했다. 그들의 생각했던 빛과 색의 본질은 오늘 날의 것과는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연구가 오늘날의 전진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빛과 색에 대한 오늘날의 탐구의 진전이 인류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연구는 실패 아닌 실패를 하였고 그래서 후세에까지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이슬락의 과학자들의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사람들에게 윤택함보다는 혼란을 주고 있다.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전자까지 조작해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위협하는 것은 전적으로 과학자들의 무책임적인 연구 때문이다. 물론 유전학의 연구가 인류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찾아가게 되면 이슬락의 과학자들도 데카르트처럼 다시 재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쳤다. 그들이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들의 연구에 대한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식물, 동물, 사람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생물의 유익성의 추구라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칫하면 그들의 유전학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연구가 내포하는 영향력이 매우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하는 신중함이 뒤따라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슬락에서의 과학자들은 단지 테크닉적인 면만 중요시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모든 만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번영을 추구하는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노아의 아들들인 셈, 함, 야벳은 황인, 흑인, 백인의 시조라는 기독교의 오래된 가설이 있다. 이것이 가설이라고 칭하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위를 떠나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진리라고 믿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이 아직도 논란이 되는 것은 이것이 가설의 범위를 넘어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구 그들의 문화적·경제적·군사적 압도적 영향력과 함께 이 가설이 황인종, 흑인에 대한 서양의 우월 의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증명될 수 없는 신화적인 맥락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단순히 맹목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가설에 객관적인 설명의 뒷받침이 가능하다면 그 맹목적인 믿음은 단지 하나의 가설의 범주를 뛰어넘는 논리적인 사실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슬락에서 인간에 대한 유전자 분포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는 일은 다분히 인종우월주의의 비 객관성을 넘어선 과학적인 유전자 우월주의의 문제로 더욱 큰 파급력을 일으킬 수 있는 관점에서 중대히 보아야 한다. 텍스트에서는 곰이 아이들의 장난감의 역할을 하기위해 곤충의 유전자와 결합한 것을 밝힌 거와는 달리 인간이 왜 인간이 아닌 다른 인자들과 유전자적 결합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유는 어떻게 됐던 간에 이런 조작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는 곰은 유전적으로 실험을 해도 되고 인간은 안 된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Ai Li A Le는 곰의 유전자적 조정마저도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대중화된 품종 개량의 방법인 육종도 이런 인간의 조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육종은 다른 품종이긴 하지만 비슷한 종끼리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인간의 혼혈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텍스트에서 말하는 인간의 유전적 조작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과의 결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더 큰 혼란의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실지적으로 이런 혼란의 가능성은 직업의 선택의 제한성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직업의 제한성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종을 상하 등급으로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분리는 혈통으로서 신분을 제한했던 고대 사회의 계급화보다도 더욱 고정적이고 비인간적이다. 사회주의의 실험의 실패로 인해 인간의 계급화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입증되었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그 계급화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인류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류는 항상 예상치 못했던 문제와 직면해왔던 점을 비추어 볼 때 르 귄의 이야기는 단지 공상 과학 소설로 머물지 않는 현실 세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슬락에서의 포리지’는 과학의 무서운 발전 속도에 비해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의 발전 속도가 정체되고 혹은 퇴보하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이다. 여기서 인간의 삶은 인간만을 위한, 인간 중심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모든 만물의 관계에서의 삶을 말한다. 이 단편 소설에 나타난 작가의 염려는 인류에게 항상 따라다녔던 염세주의적 세계관인 종말론과 그 토대를 공유한다. 하지만 그 대처 방식을 중점으로 본다면 이슬락의 포리지는 종말론과 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관적인 종말론조차도 인륜의 한걸음의 진보를 조력했듯이 르 귄은 역설적으로 희망적인 어조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텍스트에서의 화자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슬락을 방문했듯이 우리들도 설사 우리들의 현실이 어둡고 비관적이라도 외면하지 말 것을 르 귄은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by 그루브21 2013. 12. 2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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