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Bakhtin, Marxism and Russian Populism (요약)

바흐친을 맑스주의자로 보거나 혹은 그의 작품을 근본적으로 반 맑시즘적으로 보는 여러 경쟁적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수의 석학들은 그의 작품을 맑시즘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바흐친을 종교적·신학적 사상가로 보려는 러시아 해석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바흐친의 방법론은 루카치, 벤야민, 그람시 같은 맑시즘 이론가들과 의미 있는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동시대 맑스주의자와 분리되는 독특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계급 분화도 인정하지 않는 범주로서 사람들의 활력을 기초로 하는, 지배적 헤게모니의 약화를 목표로 하는 대중문화를 수호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론은 맑스와 엥겔스의 영향에 형성된 러시아 포퓰리즘의 전통으로부터 생겨났다. 따라서 바흐친의 작품은 정통적 맑시즘은 아니지만 맑시즘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맑시즘 이론에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바흐친은 러시아 포퓰리즘의 전통에서 독일 관념론을 이해했다. 물론 그가 포퓰리즘에 정통했다는 문서적 증거는 거의 없지만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흐친은 맑스주의의 선택적인 결합이었던 러시아 사회학의 오랜 전통으로 돌아갔다.

 

맑시즘과 포퓰리즘

러시아 포퓰림즘의 가장 유명한 맑시즘의 정의는 1897년 레닌에 의해 나로드니키주의라는 이름으로 주어졌다. 그것의 개요를 말한다면 첫째,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는 퇴락을 말한다. 둘째, 농민협동조합 같은 러시아 경제 체계의 예외적인 특징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셋째, 지식인과 정치적 조직 사이의 연결과 다른 이에 대한 사회 계급의 물질적 이익에 대한 묵살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 포퓰리즘이 자본주의를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의 꿈을 가지고 농업적 개혁을 지닌 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포퓰리스트들은 러시아 내의 자본주의의 발달뿐만 아니라 서구에서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발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들의 서구 자본주의의 이미지의 형성의 주된 요인은 맑시즘이었고 특히 1867년에 출간된 자본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맑스의 자본론 덕분에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첫 번째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완벽한 포퓰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의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포퓰리스트의 의견을 맑스가 참조함으로서 그들의 교류는 대화적 만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후에 포퓰리스트와 러시아 맑시즘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난 기계적인 접근은 스탈린 시대에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맑스의 사상을 제대로 계승한 자들은 러시아 맑시즘이 아니라 포퓰리스트였다.

포퓰리스트에게 소작농의 공동체는 맑스가 부르는 원시 공산주의의 유물을 대변한다. 이것은 파괴적인 자본의 개입을 막고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포퓰리스트는 주장한다. 1870년대에 맑스와 엥겔스의 인류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욕구와 원시사회의 민주성에 대한 집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입장은 러시아 혁명가 베라 자술리히와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 편지에서 맑스는 러시아 포퓰리즘의 기본 입장을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러시아의 역사적 조건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런 언급은 1924년까지 어디에도 출판되지 않았고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지만 트로츠키의 이론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논거한대로 맑시즘은 러시아 포퓰리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한 주요 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 포퓰리즘은 맑시즘의 역사의 중요한 장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주관적 사회학

1934년경에 소설가는 대중적 개념의 체계자로서, 레닌에 의해 묘사된 포퓰리즘의 세 번째 특징을 순응하는 위치로서 드러난다. 레닌은 라브로프와 미카일로브스키에 의해 발전된 포퓰리스트의 주관적 사회학을 언급했다. 이것은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이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위해 헤겔로부터 차용한 역사적 필연성의 법칙과 대치되어 발전했다. 일찍이 1856년에 라브로프는 헤겔적 범주를 물질세계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러시아의 경향을 규탄했다.

논리적 필연과 구별되는 주관적 사회학은 사회 변화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한다. 그것은 세 가지 주장을 지니고 있다. 첫째, 도덕적 가치는 사실로부터 제거되거나 끌어낼 수 없다. 둘째, 사회 과학은 객관화될 수 없지만 언제나 정서적, 이데올로기적 요인을 수반한다. 셋째, 인간의 생각과 의지는 발전의 법칙에 대항하고 결정적으로 역사적 과정을 형성한다.

주관적 사회학이 생철학과 신칸트 윤리학의 측면에서 서술되어져도 바흐친의 초기 저작에서는 발전의 논리의 수동적인 수용에 대항하는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주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맑시즘에 대한 유일한 직접적인 논평으로서 바흐친은 역사적 유물론의 힘과 매력은 결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역사적이고, 실질적 행위를 위한 장소에 놓이지만 주어진 것과 계획된 것 사이의 구별을 실패해 방법론적 죄악을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또한 각각의 사건은 역사로서 고려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상이 명확한 사회적 이상에 따라 선택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라브로프가 제시한 것처럼, 목적의식이 있는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여러 활동을 분류할 수 있는 중심적 실타래를 제공한다. 즉 역사의 창조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은 그의 특정한 이해를 보다 넓은 사회적 이해와 융합해야만 한다.

라브로프의 이론은 포퓰리즘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서구화된 진영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에서 더욱 사회학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관습의 무의식적 연대에서 해방된 개인의 의식적 연대로의 사회적 발전의 경제적 측면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개인의 출현과 연결된 역사적 세계의 탄생에 대한 그의 설명은 바흐친의 후기 관점과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흐친과 같이 라브로프도 윤리 철학에 대한 신칸트 학파의 주장을 유지하면서 헤겔적 역사주의를 취했다.

미카일로브스키는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의 당위성을 회고적 이상주의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원시 사회는 사회적 분화, 특수화, 종속 없이 단순한 협동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발달된 사회의 핵심은 노동의 분할이다. 이 분할은 인간성과 세계관의 분열을 가져온다. 그러나 역사가 인간을 파편화시켰지만 인간은 아직도 하나의 전체이고 생각은 분해될 수 없는 끈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 안에서 그는 원시 사회의 공동체 의식에 이 시대에 필요한 진보적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

바로 이 생각이 바흐친의 문화에 대한, 특히 그의 카니발 이론의 중심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미카일로브스키의 주장이 광범위하게 자본론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먼저 주목해야한다. 또한 자본론은 지멜의 신칸트학파에 대한 해석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는 자본론을 통해서 대중들이 어떻게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 노동 시장으로 던져지는 지를 발견했다. 공동 소유의 잔재들은 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보존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바흐친과 포퓰리스트

바흐친에게 신칸트 철학의 영향을 받게 한 인물은 그의 친구 카간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라브로프와 미카일로브스키를 통해서 신칸트 윤리학과 러시아 포퓰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이끌어 내는데 일조했다. 바흐친이 그의 저작 활동을 하기 전부터 이 두 지적 흐름의 융합을 위한 전제들은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퓰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신칸트학파는 헤겔의 변증법적 일원론을 칸트의 자유의 윤리학으로 대치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암시는 사뭇 달랐다. 독일에서와 달리 러시아에서의 신칸트 윤리학은 포퓰리스트와 소작농들의 동맹을 통해서 파멸적 자본주의에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1961년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에서 바흐친도 명백히 포퓰리스트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에 의해 극단에 다다른 인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 조짐은 1929년부터 나타났었다. 그때 그는 주관적 사회학의 방법론을 명백히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제시하고 있다. 위대한 소설가는 통합되지 않은 다수의 의식을 제시하면서 나타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칭점으로 톨스토이와 헤겔을 발견했다. 바흐친은 개인을 전체의 조각으로서 식별하는 시도에 대항하여 진실하고, 완전히 정당한 'I'를 옹호했다.

바흐친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발전의 사회학적인 전제 조건을 논할 때, 그는 그 조건이 러시아의 상황 아주 잘 맞는 것을 주목하였다. 서구에 비해 자본주의의 점진적 침식을 겪지 않은 러시아는 개인성과 사회성이 훼손되지 않았고 결국 다성적 소설을 위한 객관적 전제 조건들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역사의 해석과 다성적 소설의 의미는 포퓰리즘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의 진실한 개인성은 자본주의의 비극적 논리에 저항하는 원천인 것이다.

바흐친이 독백, 작가적 담론, 시학을 일컫는 것은 미카일로브스키에 의해 설명된 사회의 발전에서의 개인의 동질화의 과정과 유사하다. 그에게 소쉬르의 랑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문학 경전은 개인을 사회적 파편으로 만드는, 개인적 발화를 추상적 사회 언어로 돌리는 구심적 힘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정적인 문화의 형태는, 개인들에게 의문을 품을 수 없는 권위를 행사하는 카시러가 말하는 신화적인 것이다. 바흐친도 이런 카시러의 입장을 취하고 포퓰리스트의 논리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였다. 사람은 자연에 다시 흡수되지 않지만, 사회 유기체에는 흡수될 수 있다. 개인적 언어는 사회적 언어로 합병되어진다. 랑그의 빠롤처럼 말이다.

권위적 힘을 분산시키는 내적·설득적 담론은 라브로프의 해방된 개인의 의식적 연대의 언어적 필연적 결과이다. 즉 비판적으로 선택된 담론은 독립적·이데올로기적 삶을 격려하는 자신과 뒤섞여 있다. 바흐친도 라브로프와 같이 그런 사회성의 다양화를 지지하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계층화된 언어, 이종어는 드러나게 되었고, 세계는 주관적 사회학에 따르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적인 원칙의 진정한 사회 이상과 만나게 되었다. 바흐친이 대화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 사회학의 새로운 형태인 것이다.

 

카니발과 사회적 유기체의 부정

전통적 포퓰리스트의 정의는 바흐친의 이론인 카니발의 기능과 일치한다. 카니발에서 사회적 역할의 고정성은 사라진다. 잠시 동안 사회의 모든 구조는 전복되고 뒤집어 진다. 다시 원시 사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카니발의 군중은 미카일로브스키의 단순한 협조라는 그의 이론과 닮았다. 개인들은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초월하고 사회적 집단은 육체적으로 균질해지는 것이다. 만찬, 연회, 죽음 그리고 탄생은 미카일로브스키가 윤곽을 그린 회고적 유토피아의 상징적 구조와 일맥상통한다. 카니발의 한정적 시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 공동체의 섬들은 현대 사회 질서의 상정에 대한 깊은 비판적 토대를 제공한다.

라브로프는 단순한 협조를 토대로 사회·문화적 영역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정치적 당을 만들기를 원했다. 반면 바흐친은 그런 비평적 가능성의 생성은 종속된 개인을 체계화하고 설명하는 소설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개인들은 진정한 특성과 다의성을 다시 얻게 된다. 포퓰리스트의 정치적 지도자가 대중을 강한 정치적 힘으로 구성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대중적 회의론을 비평적 문화 광장으로 구성하는 구조로 조각한다.

카니발 이론이 니체의 디오니소스부터 신칸트학파, 생철학까지 다양한 원천을 가지고 있지만 포퓰리즘과의 결속이 가장 분명히 존재한다. 바흐친의 포퓰리즘의 수용과 독일 관념론의 이해는 그가 고대와 농촌 사회주의 사이에서 끌어온 시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바흐친은 이상적·고전적 예술 형태를 혁명적 문화로 기획하려는 민주적 지식인과 유사성을 띈다. 예를 들면 와그너의 보수적·심미적 예술 작품을 맑스와 엥겔스의 원시 사회의 이론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와그너에 의해 새로워진 고대 세계의 이미지는 맑스에 의해 취해지고 다시 러시아 이론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외적인 것이 공공적 특징을 획득한다는 그의 설명에 의해 고대 그리스 광장은 모든 것이 외면화된 곳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바흐친 문학론의 주인공, 라블레, 괴테,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에서 새롭고 완전히 외면화된 인물을 창조하려는 이들이 되었다. 마침내 소설에서 세상의 분열은 극복되어졌다. 그러나 예술과 삶의 분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결론

바흐친의 저작은 러시아의 환경과 전통에 의해 형성된 절충주의의 산물이다. 러시아 지식인으로서 그는 독일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배웠고 그것들을 당대 사회 문화적 쟁점들에 조화시켰다. 그런 신칸트학파와 생철학의 영향을 받은 바흐친의 초기 저작은 19세기 중반 윤리 철학적인 러시아 포퓰리즘을 연상케 한다. 반면 그의 후기 저작은 포퓰리스트의 사회 정치적 경향과 유사함을 띈다. 바흐친을 정치에는 무관심한 철학적 포퓰리스트로 보는 해설가는 1870년대의 러시아 포퓰리스트이 자신들을 비정치적이라고 칭하는 것을 잘못 인지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형태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 중요한 것은 정치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라고 생각했다.

바흐친은 주관적 사회학과 관념 철학의 범주에 너무 긴밀히 연결되어졌다. 그러나 산만한 상호작용 속에서 현상학적 측면에 집중함으로서 그는 더욱더 헤게모니의 의미론적 측면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 분석을 문학의 장르와 역사에 적용시킴으로서 어떠한 사회·정치적 반대보다 문학 분석의 방법론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가 언어의 집중화 같은 윤리적 문제로 처리한 많은 현상들은 사실 정치적 문제 제기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적 계층화는 단지 의식의 다변화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결정소를 가지는 것이다. 한편 몇몇 경우에서의 바흐친의 분석은 맑시즘의 원칙에 따라 수정되는 것이 필요하다. 맑시즘과 바흐친 철학의 상호작용의 과정은 역사적 유물론과 그것이 창조한 포퓰리즘 사이의 경우처럼 대화적이어야 한다.

 

by 그루브21 2014. 12. 8. 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