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은 어렵고 고상해 보이는 철학을 우리 눈높이에 맞게 옮겨 놓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작가는 세 편의 소설과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고독을 철학적 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철학책들은 매우 난해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난해함은 충분히 그 존재 이유를 지녀왔고 또 그것이 오늘날의 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이런 난해함에만 몰두해 대중과의 소통을 게을리 하면 철학은 극히 소수의 고상한 학문으로만 머물 것이다. 그래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이라는 이 책이 학계와 대중의 연결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요약

철학은 고상하고 범접하기 힘든 학문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서 활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학문이다. 이런 학문을 우리는 통합적으로 접근해 나가야 한다. 이는 일기·말하기·쓰기의 한 묶음을 말한다. 그러나 철학의 설명보다는 삶의 이야기가 넘어서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철학의 그물로 걸러지지 않는 잉여를 찾아야만 새로운 사실을 만날 여지가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삶의 이야기에 접근하는데 작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모습을 묘사하는 일에 몰두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들 작품의 허구성은 오히려 사태의 재구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적극적이고 발견적인 특징인 것이다.

 

인간은 자살을 택하기도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는 고독이라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시험에 이해 비롯된다. 그래서 고독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실존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고독의 원인

문학작품은 주로 그것의 주제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삶의 실제적인 면모가 정태적인 사태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동태적인 사태라고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박민규 작가의 소설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는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그 주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고독이 발생하는 원인을 숨겨놓아 다른 문학작품과 일치점을 이룬다. 전반부에서는 들음으로서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으로서 주인공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 독자는 타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객관적인 보편성과 관찰자의 특수하고 주관적인 시선을 모두 충분히 고려해 그 고독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동정은 낯설음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고독을 유발하게 만들 수 있다. 동정을 말하는 자는 그 사태의 이해관계에 깊숙이 억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데 있어 무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동정을 당하는 자는 동정 속에 숨어있는 자신과 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느끼게 된다. 결국 이것이 고독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타인의 말을 통해 자신이 애써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현실을 다시 견고하고 고정된 객관화된 것으로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인공 나가 전반부에서 느끼는 고독의 원인인 것이다.

반면에 주인공 나가 후반부에서 느끼는 고독은 그 원인이 달라진다. 외로움은 보통 타자에 의해 비롯되는 소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타자를 적극적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기기도 한다. 여기서 타자는 타자가 아니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강함과 약함이 공존하는 인간 실존의 보편성을 지니는 타자는 나와 일치점을 이뤄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타자와의 밀착을 통해서 인간의 보편성이 일으키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로부터 떠난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절대적인 권력이자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평등한 문자의 물리적 가치를 불평등화 시킨다. 또한 작가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독자는 정리해야만 한다. 작가는 사태의 진행과 서술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매듭을 짓고 있는지 미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독을 통한 성장

우리는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현상 속에 숨어있는 본질을 꿰뚫어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고독이 가지는 진정한 의의를 생각해야한다. 우리는 고독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동적인 감정을 간과하기 쉽다. 고독한 이의 표면은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안, 불균형 그리고 혼돈스러운 국면이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이 고독 속의 불완전한 면이 또한 성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선택에 대한 불확실이 또한 주체를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은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이다.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그리고 태어나고 그 이후에 갖는 관계 또한 일방적인 면모를 지닌다. 그래서 그런 일방성에서 빚어질 수밖에 없는 거리가 고독을 유발하게 만든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소설은 이런 고독의 원인인 거리를 좁히려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로빈슨은 무인도에서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 고독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는 런던, 스페란차를 통해 고독에 입문했고 마침내 화약통의 폭발로 인해 그 고독을 졸업하게 된 것이다. 이제 로빈슨은 사물을 자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서 인식한다. 타자는 나의 반영물이 아니라 독립되어 있는 존재이고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다. 이것은 밖에 있다라는 어원을 지니는 존재한다(Exister)라는 단어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타자는 자신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의식을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비유한 것처럼 내가 모르는 나는 빙산의 일각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타자라고 지칭한다.

문명이 인류에게 쥐어준 합리주의라는 헤게모니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런던에서의 로빈슨은 그 합리주의 횡포에 저항하지만 무인도 갇힌 그는 합리주의의 수호자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굴복할 수밖에 없는 스페란차라는 타자의 존재에 의해 그는 자신의 오만을 깨닫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 마침내 로빈슨은 세속의 문명 생활에 퇴색된 인간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였다.

· 고독과의 숨바꼭질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훤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찍이 프로이트가 지적하였듯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심리 활동에 의해 인간의 감정은 통제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통제된 감정도 어느 순간 행동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다. 영화 <레옹>도 이런 경우를 보여준다. 주인공 레옹은 마틸다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외로움을 마틸다를 구해주는 행동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 그런 자각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킬러로서는 꿈꿔서는 안 되는 인간상에 다가서게 된다.

 

외로움은 다른 감정들과는 특별히 유별난 구석이 있다. 다른 감정들은 그것의 대상에 직접적으로 반응하고 달려나지만 외로움은 그것의 원인을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외로움은 내면에 자연스럽게 숨겨지는 감정이다. 결국 이런 외로움과 관련된 숨바꼭질을 한탄조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레옹처럼 지금 당장의 행동에만 몰두한다면 과거의 외로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의 외로움은 현재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황혼녘에 되어서야 날개를 펴는 올빼미처럼 나에게 진짜 외로움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가능성으로 대상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그 인간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는 예측 불허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타인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움직임은 반성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인간만이 태도를 결정하는 데서 어려움을 수반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새로운 호흡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한다. 이것은 동물이나 사물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지옥을 만들 수도 있지만 천국을 만들 수도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처럼 인간은 치명적인 매력의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고독한 킬러인 레옹이 다시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게 한 이유인 것이다.

 

· 인간 이상의 사물

극한 고독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일시적이라도 그런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때로는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도 인격을 부여해 자신의 친구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그 사람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일 뿐이다. 그 사람의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과 사물의 부자연스런 관계는 해체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가 사람의 일방적인 욕구로 빚어진 거 외에도 다른 요소가 작용했다면 그 양상은 다른 면모를 띄게 된다. 이제는 사람 주도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사물과 사람 사이의 쌍방향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외로움이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필사(必死)의 존재에 기인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이 순간을 아낌없이 서로를 찾는 데에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처럼 오직 홀로 남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인간의 그런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을 찾는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척은 한낱 배구공을 친구로서 인식하기 시작하고 결국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까지에 이른다. 그러나 윌슨은 척의 현재의 고난을 달래주는 일시적인 노리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척이 뗏목으로 탈출을 감행했을 때 윌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행위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왜 척은 윌슨을 자신의 목숨만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타인은 어떠한 의미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타인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최후의 시험대이며 보루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타인을 찾는 것은 외로움이라는 욕구로서 쉽게 설명되어지지만 이런 욕구의 근원적인 원인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척도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현재 상황에 굳건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인정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타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배구공 윌슨은 그에게 친구이자 은인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주위 환경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이루지 못할 때 결국 사물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과 윌슨의 관계는 그런 경우에서 빚어지는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척은 윌슨에게 생명을 부여하였고 윌슨을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또 다시 윌슨에게 생명을 부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과 사물의 극진한 소통은 사물이 지니는 무지막지한 포용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포용성은 외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매력적인 탈출구가 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인간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이자, 소극적 자유라는 비판이 있지만 사물의 말없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아닌 것과의 소통은 때로는 인간과의 소통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데 급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고통을 떳떳이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칼로의 그림 <부서진 척추>에 등장하는 여인과 같이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이런 드러냄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냄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보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지하 생활자에게서 그 의미의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40년 동안 지하에 홀로 갇힌 생활을 하였지만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에 대해 쓰는 행위를 통해 고독하지 않은 것이다. 그 쓰기를 유발한 것은 홀로라는 그의 상황이다. 흔히 홀로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유발할거 같지만 그 주체에 따라서는 완전한 자신과의 합일을 이루게도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런 합일이 자신의 치부에 당당히 맞서게 만든다. 그런 당당함은 필연적인 아픔을 수반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일뿐인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아픔은 이제 밖으로 밀려나와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당당함의 수단이 쓰기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쓰기는 읽기와 달리 쓰는 이로 하여금 더욱더 적극적인 의지와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하 생활자는 쓰기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시간에 완전히 몰두해 고독을 느낄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라는 시간은 그 주체에게 시험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을 직시해서 자신의 비겁함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대로 진실한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을 격리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벽면 수행을 하는 수도사들이나 자신의 내면 깊숙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들을 그 예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그런 방법들이 꼭 진정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는 물질적인 고독과 정신적인 고독은 꼭 합일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홀로의 환경을 갖춘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타이의 시선은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나태해지려는 욕구를 견제하는 일종의 시험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동양의 사상들은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의 사상들은 타인의 시선을 허구적인 욕망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라깡은 타인의 욕망은 자기의 움직임을 결정한다.”라고 말함으로써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왜곡을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사상은 서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행동한다는 점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눈길에 상관없이 스스로 삼가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의 지하생활자도 다른 사람의 관심에 상관없이 스스로 욕망한다. 그들은 스스로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마침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게 된다.

 

· 고독의 이중성

서양철학에서 고독은 중세 이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고독은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격 완성을 위해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특히 헤겔은 고독을 사회적 규범에서 한 발 물러나 자기의 참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형식으로 규정하였다. 반면에 현대 심리학과 사회학에서는 고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들 학문의 학자들은 고독을 사회적 관계에서 이탈하여 고립화된 병적인 상태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관계의 이탈을 구조적인 것으로 보아 현대인의 고독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 말하는 고독과 사회학에서 말하는 고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회적인 네트워크 밖에서의 인간을 설명할 수 여지를 사회 과학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철학은 인간이라면 원초적으로 주어지는 관계의 끊어짐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다시 말해서 그 끊어짐이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정당성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추구의 완성을 형이상학적인 고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인 고독과 대비되는 것으로 일상적인 고독이 있다. 이것은 일상에서 자기와 타자를 연결하는 끈을 찾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런 불일치는 오히려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생산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와 타자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고독과 일상적인 고독 외에 다른 고독은 인간을 위태롭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것은 앞서 얘기한 사회학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고독인 것이다. 하지만 경험하기 이전에는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고독이 약인지 병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독에 빠져봐야 한다.

by 그루브21 2014. 7. 23. 11:14

1. 서론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중상주의(Mercantilism)를 반대하며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시장의 자율적인 경제 체제를 주장하였고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Das Kapital)을 통해서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자본가에게 착취당할 위험을 노동자에게 경고하였다.(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제4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참조) 그들 각각의 이론은 그 시대의 배경을 바탕으로 태어났고 그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탁월하였던 그들의 이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허점을 보이고 만다. 이런 이론의 해체는 필연적인 것이다. 이 필연성은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주체에 의하여 비롯된다.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의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는 이런 불완전한 주체인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불완전함은 변동성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한곳에 멈추어있지 않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멈추어 있음은 인간에게 살아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재생산해야하는 숙명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또한 인간에게 힘겨운 시험의 시간을 부과한다. 새로움은 인간에게 동전의 양면처럼 이중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그 양면 중 어둠이 밝음보다 강하게 다가오고 그것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는 종말이라는 문제가 인간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런 어둠에게 인간이 패배하였을 때는 염세주의적이고 고정된 마침내 죽은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메로님(Meronym)은 자크리(Zachry)에게 이렇게 말한다. “프레션트 족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아요.... 우리 진실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요.” (데이비드 미첼. 클라우드 아틀라스 2. 송은주 역 : 문학동네, 2010. 113p 인용) 그녀는 자크리의 계곡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환생에 집착하는지를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여기에서 환생 혹은 영혼의 존재의 유무는 중요치 않다. 그런 그들의 믿음 안에 숨어있는 인간의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인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계곡 마을 사람(Valleysmen)에게 환생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여만 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메로님의 말대로 언제나 진실은 우리 생각 너머에 있다. 그래서 타자에 의해서 강요되어진 진실이 나 자신에게도 진실인지를 묻는 행위가 중요하다. 그런 행위에 충실한 자만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진정 충실한 자가 될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타자는 인간의 본성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더불어서 인간은 무한한 반복 속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아야하는 의무를 지니는 존재라는 점이 도리어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인간의 삶의 영원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어찌 영원을 갈망하지 않겠는가, 반지 중에서도 결혼반지인 회귀(回歸)의 고리를! 나는 아직까지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를 발견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 말고는.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영원이여!” (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행숙 역 : 부북스, 2011. 349p 인용) 니체는 영원을 이렇게 열렬히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찬양을 가능하게 하기위해서는 끊임없는 긍정의 추구라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매순간의 긍정이 따르지 않는다면 영원은 인간을 허무주의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최악의 저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니체는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긍정은 말을 넘어서는 더욱 실질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실질적인 요구는 인간에게 점점 감당하기 힘든 무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앞서 설명한 영원히 반복되는 공간에서 변화와 진리를 찾는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메시지를 생산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작품의 주제가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오랫동안 철학, 문학, 비평 등지에서 연구될 수밖에 없었던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첼은 문학 작품만이 갖는 형식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새로움으로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각 단락마다 각기 다른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그 순서를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연출하여 문학 작품으로서의 특징을 배가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이런 형식적인 실험들이 새로운 메시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감추는데 급급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시도가 보편적이고 동시에 고리타분한 주제에 또 다른 생명을 부여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독자에게 남은 몫이라 할 수 있다.

 

2. 변질되는 근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를 강타한 제국주의(Imperialism)는 피 식민국가의 삶의 양식을 송두리 채 바꿔놓았다. 특히 식민 통치를 받은 많은 국가들에 낯선 타자의 종교가 은밀히 주입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와 같이 종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외에도 그 근저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악한 전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는 종교가 언어, 문화, 정신을 총괄하는 유일한 영역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부터 미래까지의 인류 역사의 이야기를 다루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도 종교를 이용하는 제국주의의 문제는 피하기 어려운 소재였을 것이다.

 

“An idea of Father Upward's, at the Tahitian Mission. You must understand, sir, your typical Polynesian spurns industry because he's got no reason to value money. 'If I hungry,' says he. 'I go pick me some, or catch me some. If I cold, I tell woman, "Weave!" Idle hands, Mr. Ewing, & we both know what work the Devil finds for them. But by instilling in the slothful so-an'-soa a gentle craving for this harmless leaf, we give him an incentive to earn money, so he can buy his baccynot liquor, mind, just baccyfrom the Mission trading post, Ingenious, wouldn't you say?"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482p 인용)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선교 사업의 소명과 인생을 함께 한 와그스태프(Wagstaff)는 담배와 기독교인의 삶 사이의 묘한 일치점을 설명한다. 그는 모든 가치보다 그리스도가 정해준 가치를 우위에 두고 있다. 노동이야 말로 악마로부터의 유혹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게으른 삶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독이라는 교활한 방법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생각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사고와 매우 유사한 일치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가 항상 타자의 사고보다 항상 우위에 있고 타자를 지속적으로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감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그들의 진짜 목적을 숨기는 허울뿐인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자기 기만적인 이 명분은 제국주의의 주체인 자신들마저도 분열을 일으키게 한다. 이 명분을 진실로 믿는 순진한 자와 이 명분의 허상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교활한 자로의 분열 말이다. 와그스태프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담배가 선교단 교역소(the Mission trading post)에서만 구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폴리네시안 사람들을 담배에 중독되게 하는 목적이 선교단의 부를 축적시키고 결국은 자국의 권력을 증가시키는 것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에 당당한 흡혈귀와 그렇지 못한 와그스태프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또한 지닌다. 그것은 인간만이 지니는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피 식민지인을 착취하는 제국주의는 태초에 그런 이기심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의 합의되어진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재탄생시키려는 진보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자연선택설(Natural Selection Theory)을 이론적 배경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라는 저서를 통해 모든 생물은 끊임없는 생존경쟁을 거쳐야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월한 종이 살아남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지구의 생명체들은 결국 육종(Sarcoma)과 비슷한 교배와 자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존에 적합한 모습으로 발전된 형태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다윈의 주장은 기존의 신 중심의 창조론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대치함으로서 인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또한 창조적인 그의 이론은 제국주의라는 인류의 잔혹한 범죄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아이러니(irony)적 상황을 연출시키고 말았다. 결국 다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이론이 오용되게 된 주된 이유는 지배 계층의 욕심 때문이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세 번째 이야기에서 식스스미스(Sixsmith)의 원자력에 대한 연구가 그리말디(Grimaldi)나 로이드 훅스(Lloyd Hooks)의 탐욕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추구가 용인될 수 있지만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 했듯이 그 욕망이 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넘어설 때는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리말디나 로이드 훅스 같이 많은 권력을 가진 지배 계층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 파급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국주의는 사회나 국가를 넘어서는 일찍이 경험하는 못한 엄청난 규모의 욕망의 주체가 저지른 비극이라 할 수 있다.

 

3. 해체되는 진리

일반적으로 진리라는 것은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인 일종의 보물로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되어져 왔다. 그래서 그런 진리에 대한 도전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 대한 원천적인 부정으로서 간주되어졌고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상반되는 진리의 공존, 혹은 진리의 상대성이 용인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종교적 담론의 붕괴와 같은 낡은 정신적 체계의 붕괴와 더불어 자연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도 크게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움직이는 물체 안에서는 동시인 것이 그것을 밖에서 보면 동시가 아닌 것을 밝힌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특수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은 이런 경우의 예로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존재로 모든 공간에서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시간이라는 개념도 결국 상대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그의 이론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자연 과학적인 표현인 것이다.(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1부 빛과 시간 특수상대성 이론 참조)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논리를 빌리자면 이 세계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모순적 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미첼도 그의 소설에서 이런 점을 그만의 방식으로 다시 묘사하고 있다.

 

But ... Union? Are you saying even Union was fictioned for your script?

No. Union prexists me, but its raison-d'être are not to foment revolution. Firstly, it attracts social malcontents like Xi-Li and keeps them where Unanimity can watch them. Secondly, it provides Nea So Copros with enemy required by any hierarchical state for social cohesion.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348p 인용)

 

위의 손미(Sonmi~451)의 대답으로 우리는 만장일치제(Unanimity)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적인 유니언(Union)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논리는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 이름이 나타내고 있듯이 만장일치제는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변증법(Dialectic)을 추구하는 민주적인 정치 집단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서있는 단 하나의 담론만을 인정하는 독재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리(Xi-Li)와 같은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굳이 국가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유니언 같은 또 다른 반국가적인 단체는 언제나 다시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장일치제가 고의로 유니언을 만드는 것이 또 다른 그것과 같은 단체의 발생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니언이 네아 소 코프로스의 필요한 적이 되는 것이 사회 응집력을 위해 필요하다는 대목에 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 비평가 이택광은 좌파의 가장 큰 적은 좌파라고 말했다.(아트앤스터디 (http://www.artnstudy.com/) 문화비평의 페다고지 참조) 이는 좌파 혹은 우파 어느 한쪽을 겨냥한 말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 제기로서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를 말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Sloosha's Crossin' An' Ev'rythin' After)에서 자크리는 프레션트(Prescients)족 메로님을 집요하게 의심한다. 사실 메로님을 프레션트 족의 교활한 첩자로 믿는 자크리의 의심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반쯤은 맞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믿는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메로님을 따르게 된다. 결국 모든 결과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크리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 내부에서 생겨난 의심을 관리하고 냉정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마침내 의심이라는 마음이 자크리 그 자신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의심과 믿음 중의 양자택일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크리가 마우나 케아(Mauna Kea)에서 더욱더 극한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어버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만장일치제도 이런 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이택광의 위의 말은 이런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상대가 극악무도하고 탐욕적인 사람일지라도 자신은 더욱더 이성적인 모습으로 그를 상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에 의해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면 자신은 그 상대방과 닮아가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더욱더 상대방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4. 반복이라는 것이 지니는 무거움

무표정한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과 직관적으로 소통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한다. 반면에 어른들은 점점 세상을 무감각하게 바라볼 가능성을 지니는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그들에게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으로 다가온다. 또한 그들은 용기가 부족한 자들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놀람을 주지 못하는 낡은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그 낯익은 세상에 안주해버리고 마는 비겁한 자들이다.(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텍스트 해석 연구소, 2007) 178p~188p 참조) 그러나 만약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점점 고정되어가는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시도를 감행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배후를 생각지 않는 아이와 무표정한 어른과는 또 다른 무언가의 긍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데이비드 미첼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클라우드 아틀라스 내의 한 단락인 제델헴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Zedelghem)와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The Ghastly Ordeal Of Timothy Cavendish)에서 풀어놓고 있다.

 

Will never write anything one-hundredth as good. Wish I were being immodest, but I'm not. Cloud Atlas Sextet holds my life, is my life, now I'm a spent firework; but at least I've been a firework.

People are obscenities. Would rather be music than be a mass of tubes squeezing semisolids around itself for a few decades before becoming so dribblesome it'll no longer function.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470p 인용)

 

로버트 프로비셔(Robert Frobisher)는 자신의 직업인 예술가의 사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예술가는 일반 대중들이 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이는 당대의 보편성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예술가로서의 생명력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인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프로비셔는 자살을 선택하고야 만다. 그는 자살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 있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를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단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프로비셔는 숨기고 있다. 그는 자신도 에어스(Ayrs)처럼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는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재능을 한 방울 한 방울씩 짜내다가 이제는 그 재능을 다 써먹어 프로비셔의 재능에 빌붙어 예술가의 삶을 연명하는 에어스 말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 작업에 마지막 혼신의 힘을 불어넣었고 더 이상 자신에게서 이를 능가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는 작품을 만들고야 만다. 이런 프로비셔의 비겁한 확고함은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에 나오는 캐번디시(Cavendish)의 유연함과 비교된다.

캐번디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덫에 갇힌 불쌍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이의 불행에 의해 발생된 것일지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결국 호긴스(Hoggins)의 불행은 그에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행운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생일대의 행운도 결국 허상과 같은 삶의 종말로 흐르는 좀 더 날카로운 덫이었을 뿐이었다. 어슐러(Ursula)와 풋풋한 사랑을 나누었던 사십년 전의 캐번디시는 그 후 사십년 동안 천천히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때의 그녀와 함께 있었던 나날들의 자신으로 돌아갈 것을 어렴풋이 꿈꾸지만 그것이 머릿속에 나타나기도 무섭게 포기해버린다. 어슐러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이미 변해버린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자신의 내면도 변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는 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로라 하우스(Aurora House)로부터의 극적인 탈출 후의 캐번디시는 전혀 다른 자로 환생하였다. 그는 이제 나이보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외침으로써 긍정의 화신이 된 자신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Like Solzhenitsyn laboring in Vermont, I shall beaver away in exile, far from the city that knitted my bones."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387p 인용) 살아있어도 죽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오로라 하우스에서의 극한 경험은 사십년 동안의 부패를 되돌리게 만들고 방금 전까지의 과거에 존재했던 캐번디시와는 전혀 다른 이가 탄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캐번디시는 또한 깨달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가 만약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불가사의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개인이 집단에 비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런던에서의 캐번디시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집단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개인이 될 때까지 열심히 준비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외친다. 그렇게 그는 다시 찾은 긍정을 표출하고 있다.

 

5. 결론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애덤 어윙의 태평양 일지(The Pacific Journal Of Adam Ewing)의 주인공 애덤 어윙은 이야기 마지막에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Yet what is any ocean but a multitude of drops?" (Mitchell, David. Cloud Atlas : RandomHouse, 2004. 509p 인용) 그는 이 말을 통해서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을지라도 하나하나의 개인들이 조금씩 바뀌어간다면 결국엔 세상도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결론은 순수하다는 것을 넘어 순진하다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캐번디시가 인정한 대로 개인이란 집단에 끌려 다니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이란 그 시대가 저지르는 범죄의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그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행위를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품을 소비하고, 자동차 같은 기계를 운전하거나 이용해야만 한다. 결국 이런 행위는 쓰레기 매립이라는 토지오염 문제와 초미세 먼지와 같은 대기환경 오염의 문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우리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칭한다. 결코 개인이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이 같은 문제를 풀기위해서 수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졌지만 인류는 결코 완벽한 이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인류는 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이론들의 실천 주체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소홀히 평가하여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단 구조가 만들어지면 그 구성원들은 그것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끌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비평사조에서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포스트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로 이어진지 반세기 정도가 흘렀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아직도 이런 구조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인류의 현재 모습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한국 현대 사회도 역시 이런 흐름에서 전혀 동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 지표를 통해 알 수 있다.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계층의 고정화가 더욱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전 같은 성공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이는 물론 과거의 고도성장 시기의 거품이 거치고 사회가 안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반증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안정이라는 단어가 고착이라는 말과도 맞닿아 있고 동시에 악화되는 양극화에 좌절하는 개인들의 생성과도 맞닿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것을 문제 제기하지 않고 고치려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손미~451의 오리즌(An Orison Of Sonmi~451)에서 나오는 순혈 인간(pure blood)과 패브리컨트(fabricant)로 완전히 분리되는 계층 구조를 가지는 사회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애덤 어윙이 말하는 바다에서 작은 물방울 같은 개인의 문제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일지라도 다시 그 인간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굳건한 구조에 비해 위축된 개인의 자신감을 다시 회복해주어야 할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4:36

1. 서론

조선 시대 농민들은 탈춤이라는 열린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억압된 현실을 일시적 망각의 세계에 가둬두려 했다. 그들은 양반을 개잘량이라는 량() 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 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다.”라고 조롱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했다.(봉산 탈춤 제6과장 말뚝이 대사) 그러나 이는 지배 계층에 의해 암묵적으로 허락된 일탈이었다. 이에 대해 바흐친(Mikhail Bakhtin)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rands annales tresueritables des gestes merveilluex du grand Gargantua et Pantagruel)이라는 작품을 통해 억압적인 봉건 질서 하에서 민중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욕망을 어떤 방법으로 분출하고, 또한 민중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지배 계층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어지는 지를 논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흐친은 피지배계층에게 일시적으로 계급적 구조의 전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지배계층과 현실 세계에 대한 불만을 스스로 조절하게 해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Literary Theory : An Anthology (Blackwell, 2004) Chapter 9 : Rabelais and His World (Mikhail Bakhtin)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리처드 2(Richard )라는 희곡은 그런 의미로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신과 동등한 위치인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탐욕과 두려움과 같은 나약한 모습을 또한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왕의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이런 해석을 넘어 좀 더 다양한 측면으로 이 작품에 접근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의 모습만으로 작품의 전체를 해석하게 만들어 리처드 2세가 함유하고 있는 전체 메시지(message)에 접근하지 못하고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리처드 2세는 1595년도의 작품으로 튜더왕조(House of Tudor)의 마지막 왕인 엘리자베스 1(Elizabeth)의 시대에 나온 작품이다. 튜더 왕조는 랭카스터(Lancaster) 가문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 왕조로서 작품에서 등장하는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의 반란과 시작을 같이한다. 물론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이후의 헨리 7(Herny )를 튜더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삼고 있지만 리처드 2세에 대한 볼링브로크의 반란이 그 이후의 왕위 다툼과 새로운 왕조의 설립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 작품은 리처드 2세를 패자로 인식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런 16세기 말의 이데올로기(Ideologie)가 작품에 영향을 미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될 수 없듯이 그 인간의 창작물인 문학 작품도 역시 그 시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또한 이런 일반론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 작가와 시대 사이의 의존적인 관계는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 시대의 흐름으로 작가의 복종이라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 2세를 비롯한 모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지금의 TV 드라마와 같은 당대 영국 사회의 대중 예술이었다. 이는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을 통해 잘 드러난다. 셰익스피어가 속한 극단의 본거지가 되었던 글로브 극장은 비록 좌석은 따로따로 되어 있긴 하였지만 농민부터 귀족까지 함께 어울려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열린 공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하에서 그 공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 계층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요구되어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웃음으로 집약되는 가벼움이었다. 그래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리처드 2세도 인물들의 희극적인 대사가 작품 전반에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도 새롭게 평가받는 시대를 초월하는 작가가 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당대의 보편성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대중적인 보편성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보편성을 숨겨놓는 작가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희곡이라는 문학의 틀에서 그것만이 가지는 특징을 잘 살려내었다. 문학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묘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지각이 너무나 자동적이기 때문에 예술은 그 지각을 지체시키거나 적어도 주위를 환기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발전시킨다.”(Victor Shklovsky.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Lee T. Lemon and Marion J. Reis: th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65. 4p 번역 인용)라고 말한 쉬클로브스키와 같이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드러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는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겉에 나타나는 이야기 속에 은밀히 심어놓은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권력 투쟁의 장으로서의 사극

사극(historical drama)이라는 장르(genre)는 작가 자신의 예술성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식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고 또한 실제의 인물들을 표현해야하기 때문에 다른 장르보다는 그 표현으로 비롯되는 이해관계가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해관계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서 객관적인 사실조차도 상반되는 사실들로 분열시키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측면이 보이듯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고정된 사건을 각각 다르게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들은 죽어있는 존재지만 타의에 의해 현재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는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 현재의 사람들은 끊임없는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역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박정희 정부 시대의 이순신에 대한 작품인 성웅 이순신(1971)’난중일기(1977)’를 보면 카리스마(charisma) 넘치는 지도자상이 잘 나타나 있다. 반면에 노무현 정부 시대의 그에 대한 작품인 불멸의 이순신(2004)’을 보면 보다 인간적인 개혁자의 모습으로의 확연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당대 집권 세력의 이해관계가 작품에 은밀히 투영된 결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마이데일리 기사 참조(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대 시대의 보편성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

 

리처드 : 좋은 질책이오. 오만방자한 볼링브로크, 내가 간다

우리 운명 판가름할 날 위해 네놈과 한판 겨루려.

이 오한처럼 온 두려움은 날아갔다.

스스로 갖는 두려움 이기는 건 쉬운 노릇

.... 하늘에 맹세코, 내게 더 무슨 위안을 찾으라

말하는 자 있으면, 나 영원히 그를 증오할 거요.

플린트 성으로 갑시다. 거기서 나 죽을 거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 이성일 역 : 나남, 2011. 106, 107p 인용)

 

리처드 2세가 타자에 의지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사이다. 그는 다른 이의 조언에 이끌려 볼링브로크와 대적할 용기를 얻기도 하고 자살하고픈 실망을 얻기도 한다. 결국 그는 왕으로서 신적인 존재가 되기는커녕 주위 신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변덕스런 인간상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약함을 몸소 고백하고 있다. 더군다나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수다스럽고 감정적인 리처드의 화술은 그의 나약한 모습과 함께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왕으로서 너무나 부족한 리처드의 모습은 극의 초반부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브레이(Mowbray)와 볼링브로크의 다툼에서 그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만 것이다. 리처드는 그 둘을 동시에 추방함으로써 자신의 죄의 공범자와 잠재적 반역자를 동시에 제거하려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선택은 공범자가 아닌 충신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볼링브로크를 잠재적 반역자에서 실재적 반역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의 선택을 최악의 방향으로 바꾸어 버렸는가? 리처드는 자신의 입지를 불안해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왕이라는 위치는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위협 불가능한 자리라고 외쳐대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빼앗길 수 있는 인간의 자리라고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불안함 때문에 떳떳치 못한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의 죽음을 숨기려 했고 미래의 적을 제거해 자신의 자리가 확고하다는 확신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이런 불안함은 조급함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아일랜드의 반란 때문에 급하게 군자금이 필요하게 되어 또 다시 볼링브로크를 부당하게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은 이 결정이 직접적으로 리처드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셰익스피어의 서술에는 명백히 드러나진 않지만 리처드는 약해진 왕권의 희생자인 것이다.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 볼링브로크, 아일랜드로 이어지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들 속에서 진정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리처드의 불안함은 볼링브로크에게도 똑같이 이어진다. 볼링브로크는 반란을 완벽히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그 성공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는 패배한 리처드를 만나도 신하로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물론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또한 그가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랜 시간동안 내려오는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볼링브로크 역시 약자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무능한 왕을 처단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엑스턴이 리처드를 살해했을 때 그의 비겁한 모습은 더욱 더 잘 드러나게 된다. 리처드가 모브레이를 버린 것처럼 그는 엑스턴을 이용만하고 엑스턴이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결국은 리처드 2세나 헨리 4(Henry )는 비슷한 왕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왕권이 약화된 시대에서 불안하고 유약한 왕으로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표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셰익스피어는 시대가 요구하는 패배자 리처드를 넘어 승리자 볼링브로크까지 아우르는 시대의 보편적 왕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3. 무비판적인 인간들

20세기 초·중반의 문학 비평 사조를 지배하였던 신비평(new criticism)은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데 있어 좀 더 객관적 기준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 객관적 기준은 다름 아닌 문학 작품, 텍스트(text) 그 자체였다. 그래서 사회·역사적 맥락과 작가에 대한 성향에 의해 비롯되는 과도한 작품 해석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평주의자들이 그런 주장을 펴는 내막에는 이것과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신비평을 신봉하는 인사들 대부분은 부유한 미국 남부 출신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이었다. 그래서 현 상태의 유지를 바랬던 그들은 문학 작품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의 현실 참여를 필요치 않을 정도로 그들은 현 상태의 계급 구조의 유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의 대립으로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적과 아군으로의 이분법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강요된 선택에 대해 그들은 이기적인 중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그런 그들의 중립은 그 시대의 지배적 입장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입장은 자신의 이익과 보존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부합되는 보편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런 행위가 16세기 후반의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요크 : ....내 고백하건대,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으니,

내 군세는 약하고 오합지중인 때문이다.

허나, 내 할 수만 있다면, 내게 생명 주신

하느님 앞에 맹세코, 내 그대들 모두를 체포하여

전하의 자비를 간원코자 무릎 꿇도록 하였을 터.

허나, 내 그리 못할진대,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중립을 지키겠소. 하니, 잘들 가시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 이성일 역 : 나남, 2011. 90p 인용)

 

요크 공작(the Duke of York)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곤트(Gaunt)가 죽자 리처드가 추방된 볼링브로크의 권리를 부당하게 취하려고 하였을 때도 요크는 그 불의를 참지 못하고 왕에게 직언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용기가 부족해 위선적인 면모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요크는 왕에게 그런 직언을 했을 때조차도 계속해서 주저하고 있는 중이었고 결국은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바로 그 상황을 피하고 만다. 그리고 볼링브로크의 반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사태에까지 이르자 그는 중립이라는 영악한 단어로 자신의 행위의 비겁함을 본격적으로 숨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볼링브로크에게 굴종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원리원칙을 말하고 있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이는 그가 리처드에게 보였던 행동가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그에게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이란 자신의 보존이 가능할 때에만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중성은 마침내 자아가 뚜렷이 분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승자와 패자로 결정되어 런던으로 돌아오는 볼링브로크와 리처드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요크는 비록 볼링브로크의 지위와 영예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리처드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목이 메는 행동으로 그 정도를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오멀이 역모의 일원이 된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다시 급박한 상황으로 몰리자 자신의 존속을 최우선으로 하는 요크 내의 자아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아들의 행복을 바라는 본능적인 아버지의 속성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볼링브로크에게 저놈을 살려 두는 건 날 죽이는 것이니, 그리하면, 역적은 살려 주고, 충신은 죽이는 것이오.” (셰익스피어, 168)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요크는 겉으로는 명예롭고 정의로운 척하나 속으로는 자신만의 이익과 생존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칼라일(Carlisle) 주교는 그런 요크가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리처드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볼링브로크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다고 공표되었을 때조차도 이 일의 부당함을 당당히 외친다. 그는 봉건적 세계(fuedalism)의 몇 안 남은 수호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볼링브로크 앞에서조차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위험을 빠지게 하는 모험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볼링브로크를 흉측한 대역 죄인이라고 선포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단단함이 그를 살려놓게 된다. 볼링브로크는 그에게 고매한 명예의 불꽃을 내 그대에게서 보았노라.” (셰익스피어, 185)라고하며 역모로 잡힌 그를 살려준 것이다. 요크는 승자의 편에 살아남았지만 명예를 지킬 수는 없었고 반면에 칼라일은 패자의 편으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명예는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칼라일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은 부족했다. 그는 시대의 소명이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왕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왕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읽지 못했다. 결국 그는 구시대가 심어준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맹목성은 요크의 재빠른 처세술과 대비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비슷한 특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크는 당장의 권력 흐름에는 민감하지만 전체적인 시대 흐름에는 칼라일과 마찬가지로 둔감했던 것이다. 그런 맹목적인 인물은 시대의 변화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4. 결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가 인간의 단계로 추락하는 왕이라는 소재를 다루고는 있지만 근대적 문학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으로 촉발된 근대 사회의 근원은 16세기 말의 영국 사회에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대에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직까지 그 당시의 사람들은 신 중심의 봉건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리처드 2세의 텍스트(text)를 보면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는 세계관을 가지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봉건적 질서와 근대적 질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몇몇 군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결국 이 작품을 근대 문학으로 오해하기 만들기 쉽게 하는 표면적 요소는 앞서 언급한 바흐친의 카니발(carnival)적 요소와 왕권 약화의 시대적 요인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왕위 다툼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단지 시대적 요구에 그대로 부합하여 작품을 쓰지 않고 그 행위의 밑바탕에 숨어있는 인간의 내면을 파헤쳐 중세(Middle Ages) 문학 이상의 것을 창조해 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로인해 그는 영국의 르네상스(Renaissance)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근대 문학의 교두보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로 하여금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핵심적 요인은 당대 시대의 요구와 대중들의 요구에 쉽게 타협하지 않는 작가 정신이었다. 모든 현상을 의심하고 그것의 근원까지 분석하려는 그의 인문학적 작가 정신은 지금 현재의 시대에도 유효한 지향해야 마땅한 정신이라 하겠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4:17

1. 서문

 

루시디(Salman Rushdie)악마의 시(Satanic Verses)란 작품에서 인간의 본질의 영원성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인간의 본질은 변화할 수 있다는 루크레티우스와 인간은 외형만 바뀔 뿐 그 안의 본질은 불변하다는 오비디우스의 대립을 말한다.(악마의 시 402쪽 참조) 하지만 대립되는 이들의 논쟁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인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유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오비디우스도 외적이지만 변화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너무 현학적이라 무의미하게까지 보이는 루크레티우스와 오비디우스의 논쟁보다는 그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간의 유동성을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될수록 그 초점이 주체성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됨을 알 수 있다. 20세기 들어오면서 주체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비평 사조와 역사적 사건에 따라 같이 변화하였다. 20세기 초반에는 빠롤(parole)을 경시하고 랑그(Langue)를 중시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출현으로 개인 주체의 자신감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 위축은 더욱 극에 달하는 듯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에 비참한 현실에 좌절하여 사회 역사적 맥락을 외면하고 개인의 내면적인 측면에 몰두하는 모더니즘의 출현과 기존 경계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에 의해 개별 발화인 빠롤, 즉 개별적인 발화는 다시금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1980년에 나온 브라이언 프리엘(Brian Friel)의 번역(Translation)이란 작품은 어떤 의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작품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화 하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이다. 하지만 번역이 다른 피식민지 리얼리즘 문학보다 돋보이는 점은 이 드라마가 제국주의라는 사회·역사적 맥락에만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 안의 인물들에 자율성과 다양성을 부여해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전체적으로 정해진 틀은 존재하지만 그 틀의 구성원들에게 즉흥연주(improvisation), 즉 자유를 허락하는 재즈와 같은 유사하다. 그러나 그 음악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각각의 연주자들이 아무리 자유롭고 화려한 연주를 하더라도 서로의 관계가 조화롭지 않다면 그 연주는 시끄러워지고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리엘의 번역 안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조합이 얼마나 적절히 이루어졌느냐가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중요하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도 독자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

 

욜랜드 : 1789년 태생이시지요.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바로 그 날입니다. 나는 그것이 아마도 저의 부친의 인생을 결정지었을지 모른다고 종종 생각한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지 않나요? 부친께서는 태어나신 바로 그 날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으신 거죠-혁명 제 일 년이었으니까요. 옛 시대는 끝이 났던 거죠. 세상은 오래된 껍질을 벗어 던졌던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에 이제 더 이상 한계도 없었던 거죠. 무한한 가능성이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때였구요. 아버님은 여전히 믿고 계시지요. 계시는 이제 곧 나타난다는 거지요.... (번역, 155p)

 

욜랜드의 아버지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났다. 그는 피지배 계층에 의해서 왕족, 귀족, 종교의 지배 계층이 전복되는 시대에 태어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억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반세기 가까이 지나도 그런 희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사회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지배 관계를 형성하는 중이었다. 결국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봉건적 지배 체계와 그 이후의 근대적 지배 체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상하 관계로 보았을 때에는 별반 다르지 않은 계급 체계일 뿐이고 그 구분의 기준이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는 세상은 오래된 껍질을 벗어던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이름만 바뀌고 몇몇 낡은 것을 버렸을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착각에 빠져든 걸까? 그 이유는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의 특성에 대한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실제 존재 조건으로의 개인들과의 상상적 관계의 재현이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소유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로서 개인들을 호명한다.”(Literary Theory : An Anthology, Julie Rivkin and Michael Ryan : Blackwell, 2004)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소수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가 투영된 도구로 보았고 그것은 물질적 존재, 즉 학교, 종교, 미디어 매체, 군대, 경찰 등에 나타나게 하여 결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주체들을 대량 생산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욜랜드의 아버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원래 부르주아만의 이데올로기였지만 물질적 존재를 통해서 욜랜드의 아버지마저도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주체로 고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물질적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제시되어있지 않지만 벨리 벡의 경우를 통해서 프리엘은 그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영국이 기존의 노천학교를 대신하는 국립학교를 세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주입하려고 했던 것도 알튀세가 말하는 물질적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욜랜드 아버지나 벨리 벡 마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시도들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 시도의 양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는 랜시 대위를 통해서 잘 표현된다. 그는 또한 알튀세가 말하는 물질적 존재인 군대에 종사는 인물로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다. 게다가 군대는 경찰과 마찬가지로 학교, 종교, 미디어 매체와는 다른 종류의 물질적 존재이다. 후자는 피지배 계층을 스스로 지배 계층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전자는 그 목표가 실패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강제적인 장치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욜랜드가 실종되고 매너스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때 랜시는 군대의 힘을 통해 즉각적으로 벨리 벡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을 경고한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욜랜드의 아버지와 랜시 대위를 통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피지배 계층이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에 쉽게 포섭된다는 것을 단지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론으로만 설명하려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배 계층의 입장과 방법에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에 피지배계층에 대한 연구도 중요해지면서 그들의 나약함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항상 무엇이 되고자 한다. 단지 살다가 죽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영원히 기억되기를 열망한다. 그렇지만 인간 본연의 그 욕망은 지배 계층의 욕망과 잘못된 만남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욕망들이 합쳐져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어떤 것이 나의 것이고 어떤 것이 타자의 것이었는지를 구별할 수가 없다. 결국 그렇게 합쳐진 자아는 또 다른 용도를 위해서 이용당해지는 것이다.

 

3. 가장 무거운 짐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12p)

 

니체(Nietzsche)는 인간의 삶을 영원한 반복으로 규정지으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크나큰 숙제를 남겼다. 인간의 모든 삶이 결국은 삶과 죽음, 즉 만남과 헤어짐의 영원한 반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긍정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니체가 인류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부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가장 무거운 짐 위에서 찬란한 가벼움의 삶을 사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쿤데라가 인간의 인생을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교차시켜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쿤데라의 해석으로 프리엘의 번역의 인물들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번역에서 휴와 지미는 벨리 벡에서 지식인으로서 지도자 계층에 속한다. 휴는 욜랜드에게 게일어가 아일랜드 현실에 대한 굴절된 결과이고 그것으로 의해 또다시 아일랜드 현실이 굴절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또한 오웬에게는 언어가 역사적 사실들보다 중요하고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드는 일을 멈추면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서 그가 단지 지식뿐만 아니라 통찰력도 뛰어난 학자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지미 또한 욜랜드를 그리워하는 메어에게 엑소가메인이라는 말로서 서로 다른 공동체가 평화롭게 화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학자다운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모순적 태도로 인해 그들의 통찰력은 공허함을 배가시킨고 있다. 휴는 결국 그들의 언어를 새롭게 하는 만드는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결국 휴가 영국의 제국주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당한 논리로 현재의 옳지 못한 주장과 자신의 비겁함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미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아테네 여신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내지만 사실 이는 그가 단지 얘기할 사람을 찾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감추는 언행이었다. 휴와 지미가 이런 공통점을 보이는 것은 결국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부족은 1798년 그들의 비겁함에서 비롯된다. 휴는 1798년 그들의 도망을 피에타스(pietas)라는 단어로 무거움을 억지로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반세기 동안의 시간이 그에게 부여하는 무게에 비하면 그때 그 행동은 얼마나 가벼웠는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휴는 아직도 1798년의 혼동에 의미부여를 안하면서 그 무게를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휴의 아들 매너스 또한 벨리 벡 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현실로부터 도망을 쳐 자신의 아버지가 걸었던 도피의 길을 다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반면 도알티와 브리짓은 학식은 부족하지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맞서는 민중들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특히 도알티는 시대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억지로 무거움을 주입하지 않는다. 그는 영국군과는 힘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과 싸울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정의는 결과를 중요치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알티가 계속 자신을 지켜나갈지 아니면 휴나 지미, 그리고 매너스 같이 자신을 포기하는 선택을 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인간의 인생은 이러한 선택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되어진다.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 없고 또한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하여도 영원히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오웬이 지명부를 외면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인생의 유동성을 대변한다. 그래서 그 무한의 무거운 세상에서 끊임없이 긍정의 세계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이다.

 

4. 자기되기

 

욜랜드 : .... 내가 아버님께 커다란 실망을 안겨드릴까 두려워요. 난 그 분이 지니신 에너지도, 일관성도, 혹은 믿음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내가 운명을 믿어서 그런 걸까요? 내가 벨리벡-아니, 발루 벡-에 도착하던 그 날,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던 그 순간, 난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지요. 그건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요. 그건 순간적인 발견 인식이랄까. 아니-완전한 발견 인식이 아니라-내가 반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어떤 것을 인식하고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마치....내가 발을 내디딘 것처럼. (번역, 155p)

 

욜랜드는 아버지와 심어준 외부의 자아와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내부의 자아 사이의 갈등을 겪고 있다. 그는 착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른다. 부친이 시키는 대로 동인도 회사에 취직해서 뭄바이에 있으려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 이곳 벨리 벡에 온 것이다. 하지만 욜랜드는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그는 아버지와 갈등이 두려워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을 외면한다. 결국 욜랜드는 자기되기에 실패한 것이다. 철학자 유헌식은 자기되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되기는 보수적이고 관성적인 진행을 거스르는 행위다. 타인의 욕구에 대해 일일이 그것의 타당성을 물어 내가 왜 이것을 따라 해야 하는가?’를 냉정하게 되묻는 행위다. 자기에게 확실하다고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순간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 휴머니스트, 2007, 141~142p)

 

유헌식의 표현에 따른다면 욜랜드는 보수적이고 관성적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타당성을 묻는 행위가 결여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완전히 고착화되지 않은 유동적 가능성의 존재이다. 그것은 벨리 벡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그 첫 만남에서 무언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동시에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포용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 같은 불완전한 존재는 또 다른 외적인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이 외적 요인은 자신의 내적 요인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작품에서 그것은 벨리 벡이라고 할 수 있다. 게일어, 마을 풍경, 친절함, 그리스·로마 신화와 아일랜드의 신화의 혼종, 토바르 브리 그리고 메어에 의하여 욜랜드는 자신의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억압되었던 자신을 스스로 풀어주어 본래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이는 오웬이 토바르 브리에 의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만약 욜랜드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을 단지 번역이라고 자신을 속이며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5. 결론

 

문학은 시대의 흐름, 모순, 소명을 여과 없이 반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대중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그들을 미래로 이끄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이 그런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이택광은 그의 강의 문화비평의 페다고지에서 그것의 예로 이문열을 예로 들었다. 이문열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금시조같은 작품에서 그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집중함으로서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지만 그 이후 이문열은 점점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만 작품에 주입하기를 고집해 결과적으로 그의 문학성은 퇴보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프리엘의 번역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우선 프리엘은 아일랜드라는 피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치우침을 최대한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표현되고 있지만 초점이 그것에만 매달리지 않고 제국주의의 의해 굴절된 다양한 인간상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피식민지 국민뿐만 아니라 식민지 국민의 굴절까지도 차분하게 제시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끝난 직후가 아니라 삼십 여년이 지난 20세기 말의 시대적 관용이 이제는 식민지의 주체에게까지도 개인성을 인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프리엘은 인간을 변화하는 요인으로서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 사이의 치우침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이는 아직도 논쟁중인 개인을 사회적 맥락의 약자로 보는 맑스주의와 개인을 왜곡된 자아로 보는 라깡주의의 끝없는 논쟁을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리엘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어 무한히 엇갈리는 인간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비록 넬리 루우의 아기는 세례식을 받자마자 경야를 치르게 되는 것처럼 벨리 벡의 미래는 매우 암울해 보이지만 도알티로 대표되는 배운 것은 별로 없지만 떳떳하고 정의로운 민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메어가 현실의 무거움을 못 이겨내고 구원자를 찾지만 오웬은 자신만의 이익을 버리고 다시 무거운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태어남, 절망과 희망은 언제나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엇갈림은 망각이라는 존재 안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로마가 잉글랜드처럼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망각된 것처럼 넬리 루우의 아기의 죽음이라는 아일랜드의 절망도 망각될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3:54

1. 다문화주의와 문화 혼종성

혼종성(hybridity)과 비슷하게 사용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는 국제화 시대를 맞아 다른 민족, 다른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특히 제 3세계 같은 약소국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학계에서는 이 다문화주의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피터버그는 이제 국제 사회는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인 다문화주의보다는 적극적이고 진행적인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에 따라야한다고 역설한다.(문화혼종성, 이음, 2012) 그래야만 국가, 민족, 지역을 초월한 범지구적 문화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혼합체가 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사실 혼종성의 개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비롯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되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로서 분류되는 족두리를 쓰거나 연지를 찍는 풍속은 원래 몽골에서 유래되어 우리의 문화와 융합된 대표적인 혼종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과 우리 문화와의 혼종이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닌 혼종성이라는 것이 요즘에 더욱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표면적인 원인을 들자면 교통, 통신 등의 기술의 발전으로 이질적인 문화 충돌의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할 요인은 이런 외적인 양적·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팽창되어가는 관계의 밑바탕에 은밀히 자리 잡고 있는 요인, 즉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낳은 굴절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을 꼽을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은 지배층·피지배층 양쪽 모두를 굴절된 행위의 대리인으로 이끌게 만든다. 프란츠 파농은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하얀 가면을 쓰고 싶어 하는 흑인, 흑인 가면을 두려워하는 백인으로 이런 양쪽 모두에게 가해진 굴절을 잘 표현한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2013) 하지만 굴절의 방향은 현재의 상태 혹은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에 피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라도 현재 지위가 지배를 했던 나라를 능가한다면 굴절의 양상은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경우로 미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경우를 일반적인 식민·피식민 관계로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 미국도 넓게 본다면 결국은 원주민인 인디언을 힘으로 제압한 제국주의적 국가이고 미국과 영국은 기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을 제외한다면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상하 관계를 뒤엎은 나라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생성된 굴절의 양상은 지금 이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의 악마의 시(Satanic Verses)는 바로 이 굴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굴절은 단지 지배층과 피지배층, 즉 영국과 인도의 제국주의적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욕망의 주체, 폐쇄적 소통, 비평의 부재,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확대되고 있다.

또한 Satanic Verses는 워낙에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있고 특히 Gibreel의 꿈을 묘사한 부분은 ChamchaGibreel의 현실세계를 묘사한 부분과 모순되게 표현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당혹감을 들게 한다. 그래서 서로를 별개의 작품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두 부분의 숨겨진 연관성을 찾아야하는지를 읽는 이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Roland Barthes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가설들을 해체시키고 독자와 언어와의 관계의 위기를 일으킨다라고 말했다. (The Pleasure of the Text, Hill & Wang, 1975) 다시 말해 기존 독자의 사고방식에 순응하는 작품은 지루함만을 일으키고 문학작품으로서의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같은 Barthes의 포스트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Satanic Verses는 희열의 텍스트의 필요조건은 일단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충분조건은 모순되어 보이는 두 부분의 연관성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2. 불안한 최초의 섞임

'Give it.' It seemed to him in later that his father had been spying on him throughout his childhood, and even though Changez Chamchawala was a big man, a giant even, to say nothing of his wealth and public standing, he still always had the lightness of foot and also the inclination to sneak up behind his son and spoil whatever he was doing, whipping the young Salahuddin's bedsheet off a night to reveal the shameful penis in the clutching, red hand. And he could smell money from a hundred and one miles away, even though the stink of chemicals and fertilizer that always hung around him owing to his being the country's largest manufacturer of agricultural sprays and fluids and artificial dung.

 

대다수의 자식들은 부모와의 관계 혹은 모방을 통해서 사회성의 첫출발을 한다. 그러나 이런 관계 혹은 모방의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오히려 부모를 추종의 대상에서 성장의 장애물로서 인식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쉽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타자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또 다른 분신으로서 자신과 동일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과 타자로서의 거리두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과의 일치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런 부모의 욕망은 자식의 그것과 필연적으로 일치할 수가 없다. 결국은 욕망이란 순수한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인 타자의 존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공동체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타자 때문에 참자와 창게즈의 욕망은 서로 일치할 수가 없었다. 창게즈가 돈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은 그의 지나친 속세적인 면에 대한 비유임에 동시에 결국 그가 어떤 타자의 시대에 살았는지를 잘 표현해준다. 다시 말해 돈에 대한 집착은 가난이라는 타자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자는 그런 가난이라는 타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창게즈 덕분이지만 참자는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새로운 타자에 영향 받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마침내 참자는 어린 시절 파운드화가 암시하였던 욕망, 즉 영국으로 대변되는 욕망에 빠져든다. 헤겔(Hegel)은 일찍이 정신 현상학이라는 책을 통하여 이런 욕망의 타자성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사실상 욕망의 본질은 자기의식이 아닌 타자에게 안겨지는 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의식에게 욕망의 진상이 밝혀진다.” (정신현상학, 한길사, 2005)이런 욕망의 타자성에 대한 논의가 개인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것은 경계되어야겠지만 욕망의 타자성은 인간의 속성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의 타자성이라는 문제는 부모와 자식, 그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하기 어려운 이유인 억압된 남성성과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 억압된 남성성이란 원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잘 드러낼 수 있었던 남자 아이가 남성다움이라는 문화를 강제적으로 학습하면서 점점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감추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남성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도 서툴게 되고 결국 남의 감정과 소통하는 데에도 서툴게 된다. (EBS ‘심리다큐 남자에서의 대사를 본 글에 맞게 수정 인용) 아들의 성기를 드러내기 위해 이불을 홱 걷어내는 창게즈의 일방적인 모습도 타인과의 공감을 이루는 능력에 대한 서투름에서 비롯되었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환되면서 남자들은 많은 책임감을 강요받았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보다는 가족에게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부여받은 이름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은 사라지고 남성성을 가진 인간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 특히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성은 타자의 욕망에 의하여 가장 큰 공격을 당한 희생물인 것이다. 따라서 역할로서의 남성이 아닌 한 개별 개인으로서의 남성의 이름을 회복이 타인과의 공감 능력의 복귀를 불러오고, 더 나아가 혼종이라는 시대의 소명에도 긍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3. 관점의 한계

When Mishal, Hanif and Pinkwalla ventured into the clubroom several hours later, they observed a scene of frightful devastation, tables sent flying, chair broken in half, and, of course, every waxwork - good and evil - Topsy and legree - melted like tigers into butter; at the centre of the carnage, sleeping like a baby, no mythological creature at all, no iconic Thing of horns and hellsbreath, but Mr Saladin Chamcha himself, apparently restored to his old shape, mother-naked but of entirely human aspect and proportions, humanized - is there any option but to conclude? - by the fearsome concentration of his fate.

 

현실에서 소통이란 단어는 원래 가지고 있는 개방성, 유연성이란 의미에서 폐쇄적, 경직성의 의미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만남에서 소통을 이루려면 서로 일정한 범위내의 생각의 일치를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서 정립되어가는 현상에 대한 관점이 그릇된 폐쇄적 소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립된 관점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많은 사회·정치적 대립 현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라깡(Lacan)이 상상적 단계의 아이들이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 상징적 세계로 던져지면 다시는 상상적 세계로 못 돌아온다는 설명과 같은 맥락이다. (Ecrits, A Selection, 1977) 물론 실재계라는 세계가 존재하지만 현실 세계의 이면에만 존재하는 현실로의 출현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하지만 이 Satanic Verses는 판타지 소설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참자는 지브릴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킴으로서 상상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 선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시 아기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지브릴에 대한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오비디우스를 버리고 루크테티우스를 선택한, 즉 자신의 변화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굳어진 자신의 관점을 다시 되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열등감, 경멸 그리고 영국에 대한 숭배, 열망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의 굴절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나 참자의 이런 신비스런 회귀가 지브릴에게도 참자에게도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그 이후의 참자의 지브릴에 대한 집요한 복수는 회귀 이전의 참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참자는 아이들처럼 사태의 배후와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태 곧 지브릴에 대한 복수와 바로 밀착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집요한 복수를 감행할 힘을 얻는다.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유헌식, 휴머니스트, 2007)의 글을 본 글에 맞게 수정 인용)

지금까지 관점의 부정적인 면만 서술하였지만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관점이라는 것은 아주 필수적이고 자연스런 것이다. 레닌(Lenin)무당파가 가장 당파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관점이 없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설상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을 선언한 이면에도 힘이 없는 나라로서의 정치적인 포석이 깔려있는 것이다. 또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신비평이라는 문학비평사조를 소극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간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Literary Theory, Wiley-Blackwell, 2011)

결국은 문제의 초점은 고정되어가는 관점의 속성을 얼마나 지체시킬 수 있느냐에 집중된다. 그래야만 더욱 난잡해지고 복잡해지는 세계가 갈등과 불신의 길이 아닌 화합과 평화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4. 경험적 지식의 한계

The foundling was perhaps two weeks old, clearly illegitimate, and it was equally plain that its options in life were limited. .... The Imam examined the baby briefly; rose; and turned to address the crowd.

'This child was born in devilment,' he said. 'It is the Devil's child.' He was a young man.

The mood of the crowd shifted towards anger. Mirza Saeed Aktar shouted out; 'You, Ayesha, kahin, What do you say?'

'Everything will be asked of us,' she replied.

The crowd, needing no clearer invitation, stoned the baby to death.

 

위 인용문구에서 아기를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악마의 아이로 단정 짓고 돌로 그 아기를 살해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이렇게 잔인하고 광기의 행위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그의 저서인 자본론에서 상품 분석을 맨 서두에 둔 이유는 상품들을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총체성에 도달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추상화의 단계, 즉 비평의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대용량의 정보의 시대인 현재에도 끊임없이 현상에 대한 비평적 사고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보로서 대표되어지는 경험적 지식의 부족보다는 비평적 사고의 부족이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Lukács의 물화 이론에 대한 이택광 교수의 강의 수정 인용) 화냥년이나 호래자식 같은 말들은 이런 비평적 사고의 부족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말들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있는 유교적 도덕규범 같은 지배적 의식들이 기본적 상식적 사고를 유린하는 모습인 것이다.

이런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모습을 빈번히 보여주는 것은 그 집단이 얼마나 경직된 조직인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경직된 조직은 전체주의적 집단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다분히 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전쟁 같은 재앙을 최근에 겪은 집단은 그 구성원들에게 군대적인 마인드를 강요한다. 지휘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권위적인 조직체를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단에는 이원론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지휘 체계에 부합되는 것과 아닌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합되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억압되고 착취당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만약 지휘 체계가 자신의 방향을 잃고 광기로 흐른다면 인용 문구처럼 그 광기에 동조하게 되거나 아니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또한 사람들을 비평적 사고의 부재의 길로 모는 이유로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소극적인 자유를 이유로 들 수 있다. 사이드의 부인 미샬이 이 무모한 순례에 참여하는 계기는 자신의 불행 즉 암선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도피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외면하게 만들고 우물 속에서 발견된 신라 아이의 유골같이 왜곡된 일치를 부추긴다. (KBS 역사 스폐셜 신라 우물 속 아이의 미스터리(신라 말의 극한 혼란과 가난을 대변하는 인신공양)) 고난의 순례 때문에 죽은 사르판치의 부인을 외면한 티틀리푸르의 순례자들의 행동과 자신들의 고난과 불행 때문에 우물에 아이를 공양으로 바친 신라인들의 행위는 본질적인 같은 것이다.

 

5. 새로운 시대

When the news got around Jahilia that the whores of The Curtain had each assumed the identity of one of Mahound's wives, the clandestine excitement of the city's males was intense; yet, so afraid were they of discovery, both because they would surely lose their lives if Mahound or his lieutenants ever found out that they had been involved in such irreverences, and because of their desire that the new service at The Curtain be maintained, that the secret was kept from the authorities.

 

Satanic Verses에서 Gibreel의 꿈을 묘사한 부분, 즉 마호메트의 열두 부인을 창녀로 비유하는 모습 같은 이슬람교에 대한 모독이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하는지에 대한 격한 논쟁이 서방과 이란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 간에 발생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이란의 국교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는 것을 미루어보아 작가의 금기에 대한 표현은 이질적인 문화 사이의 혼종성의 관점으로 볼 때 악영향을 끼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작가 자신이 피지배층의 신분으로 지배층의 논리를 대변했다는 점에서 그 비난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타자가 금기로 설정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포기하고 다양성의 이름으로 외면하는 것도 혼종성의 관점에서 볼 땐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 섞임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오히려 서로의 간극을 더 벌려주고 갈등의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이런 Rushdie에 대한 비판은 그의 묘사의 모독성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그 이면에 숨어있는 비판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 일부다처제, 여성 차별, 돼지고기로 대표되는 현실에 대한 종교의 간섭의 범위에 대한 문제 제기 같은 이성적인 논쟁거리를 수면위로 이끌지 못하고 유독 작가의 표현의 모독성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그리고 Satanic Verses는 같은 현상·대상을 다르고 낯선 표현으로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문학 작품으로서 인식도 함께 고려되어져야한다. 그런 바탕아래 Rushdie의 선정적 묘사와 작품의 총체적 의미 사이의 연관성이 합당하게 부합되었는지를 비평하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지브릴의 꿈을 묘사한 부분과 참자의 변화 사이의 모순적 간극은 복잡하고 섞여가는 이 세계에 대한 이미지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Rushdie의 애증이 교차하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천당이나 지옥 같은 신들의 세계는 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약하고 변질되지만 흡수력 있고 끊임없이 생산적인 인간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계층에서의 자기비판이 다른 계층으로부터의 비판보다 더욱 강한 호소력과 객관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물론 Rushdie는 영국 유학 등 서방에서의 그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이슬람 세력의 한사람으로서 자기비판을 했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14살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던 사람으로 이슬람 문화를 그의 정체성의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언제나 어떤 현상 혹은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논리 밖에 서야만 그 비판할 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독재 정권치하의 있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정권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처럼 어느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양쪽 혹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새로운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혹은 대상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다는 주장은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Rushdie같이 혼종의 인물들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한 시대의 흐름에 있어서 앞으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가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관계 같이 골이 깊은 종교 문제나 좌익, 우익 같은 정치·이데올로기적인 오래된 갈등, 그리고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제국주의적 역사의 오점에 대해 새로운 혼종의 인간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낙관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권력의 힘, 즉 굴절은 워낙에 강력해 새로운 혼종의 인물들까지 어느 한편에 설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Rushdie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들은 굴절들의 세력 확장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대변해준다.

by 그루브21 2014. 6. 19. 10:54

 

 

The New Jazz Band at 도산공원

 

by 그루브21 2014. 6. 7. 02:37

 

예술은 이미지에서 탄생한다(Art is thinking in images)'라는 일반적인 예술에 대한 생각이 있다. 이는 별다른 저항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런 통념에 전면으로 반박하였다. 그들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미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들의 이런 비판은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문학은 어떤 지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에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드는데 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사람들이 사물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사물의 인식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미지가 예술의 원천이라고 가장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실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개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가 공통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특정한 이미지가 가지는 느낌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 대다수이다. 그렇기 이미지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쉽고 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예술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본질은 그런 상투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미지를 어떻게 재배열하느냐는 것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의 제재는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점점 들면서부터 자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그 자신의 세계가 너무나 익숙해지고 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도 어린 시절에는 자기 주변의 세계에 무한한 호기심을 느끼며 삶의 재미를 느끼며 성장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로 대표되는 예술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삶의 지루함에 빠진 어른들에 희망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2. 20. 19:31

 

꿈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꿈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고 무질서해 의미 없는 것으로 터부시되거나 혹은 반대로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평가는 꿈에 대한 연구가 너무 비과학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더딘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수많은 정신병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꿈의 내용을 접했고 오랜 연구를 통해 질서 없어 보였던 많은 개별적인 꿈들이 하나의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발견하였다. 그것은 소망 충족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꿈의 내용은 왜곡되고 억제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소망 충족의 발현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꿈은 왜 왜곡되고 억제되는 것일까? 이는 낮 동안의 의식이 밤에도, 즉 꿈속에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낮 동안의 의식의 힘이 약해져 꿈이라는 왜곡된 형태로나마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낮 동안에는 의식과 전의식에 의해 억압되었던 무의식이 암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동안 무시되어왔던 무의식이 프로이트에 의해 등장하게 되었고 이제는 심리학의 일부가 아닌 심리학 그 자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의식적인 것은 무의식의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꿈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과거를 통해 연결된 미래를 만난 수 있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꿈은 어떤 소망을 충족된 것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를 미래로 이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이 미래는 결코 깨지지 않는 소망에 의해 과거와 닮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2. 18. 20:04

 

토니오 크뢰거본문에서 나왔듯이 예술가는 사물들을 굳이 그렇게 볼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의 다른 방식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일반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방법을 선사한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인식이 예술가들에게 끝없는 자기모순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본문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이를 인신의 저주로 부르며 끝없이 벗어나고픈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여자 친구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게 난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것을 서술하느라 가끔 죽도록 피곤합니다.” 라고 하며 자신의 모순성을 호소한다.

그는 한스 한젠처럼 세상과 옹호적으로 소통하고 싶고,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 하는 허깨비의 세계가 아닌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평범한 세계를 바라보고 싶어 했다. 철두철미하고 정확한 성품을 지닌 북쪽 기질의 자신의 아버지를 토니오는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해가 안 되고 떨쳐버리고픈 어머니의 관능적인 남쪽 기질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차분한 가운데 무언가 완전한 것을 만들어 내기 보다는 풍요롭고 생기에 넘치는 것을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돌, 즉 북쪽과 남쪽의 기질이 충돌로 인해 항상 고통스런 삶을 영위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이 유명한 작가된 후에도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자신 고향과 북쪽의 덴마크를 여행하면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자신의 충돌한다고 생각한 두 기질이 사실은 서로 상쇄 작용을 하고 있었다고 깨닫는다. 비록 자신은 <길을 잘못 든 시민>이지만 이 시민적인 사랑이 자신을 한낱 문사에서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고 깨닫는다. 이 시민적인 사랑 안에 그리움이 들어있고 그리고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순결하게 짝이 없는 더 없이 충만한 행복감이 있다는 것을 토니오 크뢰거는 받아들인다.

 

by 그루브21 2014. 2. 14. 17:02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를 낯섬으로서 정의한다. 그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을 가진 타자를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은 근본악이라고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선을 행함으로써만 근본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레비나스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타자란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과 타자의 문제는 자기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문제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서 내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이 내 자신으로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또한 타인을 통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된 자아를 표출할 수 있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영어 exist 라는 단어는 Ex(밖으로) + ist(존재하다) 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에서 유추해보면 서양인들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밖으로 나가 수많은 타자 즉 수많은 내 자신과 만나는 길이 내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서양은 타자란 인간으로서의 절대적 과정중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자를 대하는 태도도 그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패러다임으로 타자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오랜 시간 축적되는 면도 무시할 수 없기에 자기 자신의 패러다임을 본인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패러다임은 그 주체가 오래될수록 확고해지고 고정되는 성향을 가지기 쉽다. 편함과 보수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 때문에 이미 확립된 자신의 패러다임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다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며 결국은 처음에 자신이 생각했던 의미는 퇴색되고 그 껍데기만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패러다임을 유연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확고부동한 패러다임의 긍정적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성장은 나이를 먹어도 누구나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축적의 의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축적은 자신의 의지 외적인 부분에서도 이루어지고 양적으로 많다는 것은 질적으로 낫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경험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물론 모든 경험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성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경험에 얻어진 모든 깨우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의 본질이 퇴색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너무나 익숙해진 경험은 그에게 어떤 깨우침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의 깨우침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익숙함의 반복이고 깨우침이 상실되었다면 그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 거와 다름없다. 그런 경험은 단지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학은 익숙함을 낯설음으로 바꾸기 위해서 지금까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진정한 경험 혹은 깨달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이런 경험을 달리 말하면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갑작스런 충격으로서의 경험은 영화나 문학 같은 예술 장르에서 널리 쓰이는 소재이다. 특히 영화 'Stand By Me'에서 이런 주제가 잘 나타나 있다. 영화에서 고디를 비롯한 4명의 아이들은 시체를 찾은 경험이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한순간의 짧은 경험이 그 이후의 수십 년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 경험이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겪더라도 모두 다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 'Stand By Me'에서도 4명의 아이들이 모두 시체를 봤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이는 고디와 크리스 뿐이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자신 안에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면 이는 경험하지 못한 거와 다르지 않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소설 대성당은 소소하고 건조한 문체로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다루고 있다. 항상 그의 단편 소설은 평범하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대성당에서 화자가 아내의 친구인 낯선 맹인과의 만남은 언뜻 특정해 보이는 설정이지만 실은 우리는 일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낯선 타자를 마주치는 것에 알 수 있듯이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소설 대성당의 소재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그러나 텍스트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느낌을 주면 존재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이런 일상적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정하고 특별함을 찾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자 작품 존재의 의미이다.

이 대성당이라는 작품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서의 한정된 공간의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의 의미에 대한 무게는 장편 소설 못지않게 강렬하다. 또한 단편 소설만의 간략한 서술의 특징으로 독자의 행동반경을 더욱 더 자유롭게 하여주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성장 소설의 흐름과 유사점을 보여준다. 다만 그 대상이 이미 주체화된 어른이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성장이란 단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한정되는 단어로서 오인할 수 있지만 기존의 삶에 지치고 고착된 어른들의 삶에도 아이 못지않게 성장이란 단어가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작품에서 화자의 아내가 시를 쓰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로 삼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겨운 현실에서의 삶의 안주와 극복되지 못하는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성장을 희망하는 욕망의 표출이다. 그리고 아내의 시를 새로운 성장을 희망하는 시가 있고 또한 그렇지 못한 시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맹인 친구가 아내 얼굴의 모든 부분부터 목까지 그의 손가락으로 만졌을 때 생겼던 느낌을 표현한 시로 대표된다. 또 후자는 아내가 공군 행정관의 아내로서 가졌던 느낌을 표현한 미완성의 시로 대표된다. 이 시는 긍정적인 성장의 모습을 도저히 끄집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화자의 아내는 아직 완성할 수 없었다.

현대 사회의 남편이라는 개념은 두렵고 낯선 타자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이는 현대인 구조적 고독감으로서 다시 해석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풀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점점 기술의 발전이 커지면서 현대인의 삶은 더욱 복잡성을 띄게 되었다. 이에 직업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주거지의 폭도 예전과 비교도 안 되게 확장되어 졌다. 그럼으로써 사람 간의 이해관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이제는 예전의 협동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계약적인 인간관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타자간의 관계는 형식적이고 기계적이게 되어버렸고 점점 인간은 고독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대 인간의 사회에서의 구조적 고독은 가족이라는 제도 하에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고 재충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만 이런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조차도 소통의 부재로 고독감을 더욱 깊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실지적으로 이혼율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고 나 홀로 혼자 사는 싱글족이 늘어나는 일이 이를 대변해 준다. 이와 만찬가지로 작품 안의 부부도 심각한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다. 우선 소설 속의 화자인 남편은 아내의 시를 쓰는 행위의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화자는 아내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행위를 아내와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잦은 근무지의 변경으로 사회에서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화자가 가정에서조차 관계의 단절을 느끼니 더욱더 견디기 힘들어진다. 결국 화자는 아내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후에도 아내와의 관계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고 어정쩡한 소통의 부재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부부간의 소통의 부재는 양쪽 모두에게 다른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즉 이 부재는 아내로 하여금 맹인 친구와의 소통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끔 만들었고 화자는 화자대로 마약을 하고 의미 없는 TV 시청을 함으로서 고립된 현실에서의 도피처를 마련하게 하였다.

이런 악 순환적 부재라는 수렁에서 빠진 부부에게 맹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아내와 남편에게 상반되는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 아내에게는 구원과 같은 의미였고 남편에게는 단지 질투의 대상이었고 두려운 낯선 타자였다. 맹인에 대해여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남편은 아내의 시 자체에 대해선 관심은 없지만 그 맹인이 아내의 시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은 신경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시의 내용이 맹인이 아내의 얼굴을 만졌을 때의 그 느낌을 쓴 것이 때문에 더욱더 그러 할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아내의 친구인 맹인에 대한 질투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남편은 생각을 유연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약간은 세상을 삐뚤어지게 바라보는 관점의 소유자였다. 맹인의 죽은 아내를 얘기하면서 그녀의 이름이 유색 인종이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는 맹인의 아내가 Negro 인지 물어본다. Negro 라는 단어가 가지는 인종적인 부정적인 면은 남편의 캐릭터에 대해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맹인에 대한 선입관이 상당하다는 것이 텍스트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남편이 맹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고 단지 간접 경험으로 인한 습득만으로 맹인에 대한 개념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남편의 이런 삐뚤어짐의 원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텍스트에서는 그것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극히 주관적인 추론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작품속의 화자처럼 선입관에 사로 잡혀 있고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배타성을 가진 사람은 없다. 이는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이는 자신의 성장의 동기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퇴보의 동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성장을 통해 퇴보의 동기를 선택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퇴보성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힘겨운 상황이 한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보다는 이 상황을 피하려고 하거나 혹은 아애 외면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고 우리 자신조차도 일상에서 계속되어지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 하나하나가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에게 남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행했던 경험들이 다시 돌아와 나 자신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작품속의 화자인 남편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아내는 어떤가? 아내는 남편보다는 소통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사람이지만 다소 소극적인 사람이다. 자유에는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가 있는데 예를 들면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놓아지게 되면 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기기도 하는데 이를 사람들은 소극적 자유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교도소를 탈출해 나가는데 주인공의 자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개선의 의지를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적극적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주인공을 선하고 반면 주위 환경을 악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그 교도소를 탈옥 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교도소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주인공이 그 교도소에 갇힌 상황에서 도망쳤을 뿐이다. 그래서 이를 소극적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내는 자기의 삶을 소극적 자유로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절망적이었을 때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저질렀고 그 이후에도 맹인 친구와의 소통을 자신의 삶의 유일한 도피처로 삼았다. 왜냐하면 정작 중요한 남편과의 관계의 어긋남에 대해서도 개선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Negro 라는 인종 차별적 말을 할 때에나 남편이 마약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화를 내고 멸시적으로 바라볼 뿐 남편을 개선시키려는 의지나 남편을 이해하려는 행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어긋난 소통의 냉소적 거리감을 유지할 뿐이다.

이런 남편과 아내의 변하지 않는 부정적인 소통의 단절에서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이는 맹인이다. 엄숙하고 근엄한 웃음기 없는 집에서 갑자기 태어난 아기가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맹인은 남편과 아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소설에서는 특히 남편과의 대비되는 모습을 많이 묘사된다. 맹인은 남편과 달리 낯선 타자를 거부감으로 바라보지 않고 호기심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어떤 제안도 거절하는 경우가 없다. 심지어 남편이 마약을 같이 하자고 권유했을 때조차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물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런 포용력을 가지고 화자의 아내와도 소통을 이룰 수 있었고 햄(Ham) 통신을 하거나, 암웨이(Armway) 영업소를 하는 등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더 세상을 잘 보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그는 마음속 눈으로 컬러 TV와 흑백 TV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하나의 장애가 생기면 다른 것들이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해 좀 더 그 기능들이 향상되어진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맹인에겐 물리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내적인 부분까지도 포함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혼 생활에서 아내와의 관계도 잘 이어나갈 수 있었다.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의 암 투병도 그에겐 자신의 안 보이는 눈과 같은 단지 장애 일뿐이었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은 둘이 아닌 하나로 진정한 부부로 살아갈 수 있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이나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화자가 이해할 수 없었던 마음의 눈으로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아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맹인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장애를 뛰어넘어 세상을 자신만의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이에 남편의 단단함을 풀어줄 순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지체 없이 그에게 선을 베풀었다

남편을 무언가 새로운 세계로 이끈 사람이 아내의 친구인 맹인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 남편 자체에 있었다.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감동을 느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타자의 뛰어남이나 설득력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런 타자를 받아줄 인자가 없다면 그 타자와 일종의 화학 작용은 일어날 수 없었고 결국은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으로 이 논리를 다른 측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타자의 논리를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이는 결국 어떤 타자도 내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방적인 것이 아니라 무사고이다. 이런 무분별한 받아들임은 결국 자신의 자기되기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대 사회의 자신의 타자화의 대한 유혹 때문에 자기되기는 더욱 더 위태로워졌다. 이런 측면으로도 생각해 보아도 텍스트에서의 화자는 아직 표출되지 않았던 자신의 자기되기의 단서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화자는 맹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절실히 욕구하는 그런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전에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화자를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꽉 막혀 질식할 거 같았던 세계가 이제는 화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와 진정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사실 그 구원의 손길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화자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제 화자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화자가 맹인과의 만남 뒤에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화자의 대사(It's really something p307)를 통해 그가 얼마나 바뀌었는가는 암시적으로 적절히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열린 결말은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에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고 있다. 독자는 이런 작용을 통해서 작가와 대등한 주체로서 텍스트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독자의 참여에 의해서 텍스트는 고정적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가능성의 대상으로서 시대와 장소의 범위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by 그루브21 2014. 2. 1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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