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모범적이고 순수한 형식으로 집시 기질과 침울한 깊이를 거부하고, 타락의 심연과 관계를 끊었으며 타락한 자를 물리친 작가였다.’

 

우린 어쩌면 그런 심연을 거부하고 품위를 얻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아무리 돌아서려고 해도 그 심연이 우리를 유혹하는 거야.”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중에서

 

인생은 해야만 한다하고 싶다라는 의지와 욕구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의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의지와 욕구 사이에서 욕구 쪽으로 치우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 예술가를 단지 자기 하고픈 것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도 이런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더 높은 단계의 예술의 질을 추구할수록 단지 욕구뿐만 아니라 그 욕구를 조절하고 절제할 의지도 극도로 요구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훌륭한 예술가의 삶에서 진리를 묵묵히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의 모습이 발견되어지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의 아센바흐는 바로 그런 예술가였다. 그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는그런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구도자적 인생에 무언가 다른 것을 입히고픈 욕구를 느낀다. 이 욕구는 여행을 가고 싶은 생각으로 막연히 표출된다. 그리고 그는 여행을 통해 그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발견한다. 아센바흐는 타치오라는 미소년을 통해 인지하지 못했던 욕망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은 아센바흐의 생각과 행동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는 경멸의 대상이었던 화장을 진하게 한 노인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대치시켜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외면했던 육체성이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아센바흐는 다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by 그루브21 2014. 2. 6. 19:33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시간의 축적이었다. 이런 욕구에 의하여 철학, 도덕,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고 인간들도 그것들에 의하여 염원이었던 진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서 종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종교가 철학과는 달리 신에 대한 수동적 의지(依支)를 허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에 대한 의존을 통하여 종교는 인간에게 미지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고 미래와 죽음의 불확실성에 대한 심리적 해결책까지 인간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을 통하여 더욱더 인간에게 더욱더 큰 믿음을 갖도록 해 주었다. 개인보다는 타자와의 공존이 인간에게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성은 인간의 독립성에 대한 나약함에 비롯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종교는 그런 자신만의 특징으로 그렇게 인간에게 군림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역으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신성화되는 절대적인 권위를 인간에게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 신성화되고 절대적인 권위인 종교는 때로는 다른 진리에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키려는 지배 집단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자신의 본질적 존재 이유를 자신의 체계 유지를 위해 망각하고 타 진리를 배척하는 것은 이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하는 독재자와 동등한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문제도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라는 점을 알려준다. 더욱이 점점 집단화되는 현대 대다수 종교의 특성으로 볼 때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종교 내에서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포함해 여러 영향으로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종교(인간)의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는 신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이전까지는 겪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에 의하여 크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흔들림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에 의해 더욱 표출 되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학, 문학 등 모든 사조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단지 20세기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 이미 중세 시대부터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런 진리에 대한 위기는 크게 세 가지 사건에 의하여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의 지동설이고 두 번째가 다윈(Darwin, Charles)의 진화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다. 위의 세 가지 사건 모두가 함유하고 있는 공통점은 자만하고 오만했던 인류의 환상을 깨부수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본질적 근거였던 환상들이 세 사람의 실증적인 입증에 의해 깨지게 되자 인류는 본질적인 존재의 이유에 대한 어둠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산업 혁명으로 비롯된 런던 스모그같은 환경적 재앙과 제국주의에 의하여 비롯된 인간의 의한 인간의 착취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로 인하여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혐오와 의심은 극에 달했다. 이는 기존의 종교와 철학이 수천 년 동안 발전하고 축적됐음에도 이런 인간의 악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과연 종교와 철학은 무엇이며 어떤 가치가 있는지, 선과 악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에 대한 의심을 촉발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 소설 'Young Goodman Brown'은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 이 단편 소설의 브라운의 모습과 많은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굳건한 가치관 속에서 선과 악의 질서의 파괴에 의하여 브라운이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봄으로서 위기에 처한 현대 인류의 해결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주요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브라운의 변화의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Young Goodman Brown’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Brown 앞에 붙여진 Goodman과 그의 아내의 이름 Faith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히려 너무나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수식어여서 오히려 감추고픈 무언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Goodman 앞의 수식어 Young이라는 형용사는 긍정에 긍정을 덫 붙이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무언가가 필요치 않은 완벽한 현실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야기 시킬 것 같은 불안감을 독자들에게 심어준다. Young이라는 단어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기존 체계의 전복을 꿈꾸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아내의 이름인 Faith라는 단어도 복합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우선 그녀가 남편을 의심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이름(Faith)이 그 의미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페이스의 의심은 Brown이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적으로 그녀는 Brown이 세일럼 마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믿음을 잃어버릴까봐 그를 의심하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남편의 믿음이 그의 숲으로의 외출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한 그녀의 제지는 그녀와 Brown 사이의 공통의 믿음을 지키고픈 관점에서 그녀의 Faith라는 이름을 그녀와 어울리게 한다. 결국은 아내가 지키고 싶었던 Faith의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다른 대상이었던 것이다.

 

".... Pray tarry with me this night, dear husband, of all nights in the year!" .... "....What, my sweet, pretty wife, dost thou doubt me already, and we but three months married!"

 

여기서 아내의 믿음은 종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청교도(Puritanism)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이다. 이는 클로스(Goody Cloyse) 부인이 브라운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쳐준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브라운의 사회는 청교도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교리문답은 청교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의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인디언 주술사를 두려운 악마로서 묘사하는 부분으로 유추해보아 아직 초기 단계인 미국의 청교도들의 정착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단 이런 배경적 추론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나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일럼 마을 사람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는가는 소설 속의 브라운의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나 있다. 늙은 지팡이의 남자가 브라운과 계속 숲에 들어갈 것을 재촉할 때 브라운은 그와 계속 간다면 세일럼 마을의 목사님을 무슨 낯으로 보냐고 하면서 더 이상 숲에 못 들어가겠다며 항변한다. 이 소설은 세일럼 주민들이 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청교도적으로 살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청교도들의 독실한 삶의 동기를 유추함으로서 보다 더 작가가 말하고픈 의미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이미 서문에서 밝혔듯이 종교는 철학이나 윤리학과는 달리 좀 더 대중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집단성은 미국 개척 시기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집단이란 사람들에게 일종의 위로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척 시기 같은 불안정하고 변화가 심한 시기에서는 신이 가지는 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더욱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상황에 놓였을 때는 자신을 위로하고 의지하고픈 대상을 찾으려는 속성을 가지는데 특히 절대적 신을 믿는 종교에서 그 희망을 찾으려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 특유의 내세관을 바탕으로 현세의 불행을 감해주는 것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종교는 생활 도덕으로서 윤리관을 대치하기까지 이른다.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종교에서의 윤리관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그 이유와 그 당위성을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윤리관은 내세관과 연결되어 사람들에게 더욱 더 지켜야 할 덕목으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런 광범위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에 지나친 절대성을 부여해 다른 종교, 집단에 대한 배타성을 띄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는 본질을 배제한 체 형식에 집착하는 인간들의 오류에서 비롯됐다. 자신들의 종교와는 다른 의식과 절차를 관용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미개하고 자신들의 종교가 말하는 악마의 형상으로서 비난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11세말부터 약 200여 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가톨릭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함에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 이전부터 이미 가톨릭과 이슬람교는 서로 다른 유일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존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그것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거기다가 이런 종교적 명분뿐만 아니라 봉건영주, 기사, 상인, 농민 계층의 저마다의 세속적 욕망과 합쳐져 광기의 종교 전쟁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런 종교적 마찰은 한 종교 내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에서의 마녀 사냥이 대표적이다. 마녀 사냥은 종교 전쟁, 기근, 흑사병 같은 파국적 상황에서 가톨릭의 지배 계층이 이런 불행을 설명하기위해 평범한 사람을 마녀라는 가상의 허울을 씌어 자신들의 권위를 위한 희생양으로 만든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십자군 전쟁과 마녀 사냥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의 타락에서 시작된 청교도 자신마저도 가톨릭의 모순과 타락을 되풀이 하는 점에서 자기 분열적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Ha! ha! ha!" roared Goodman Brown, when the wind laughed at him. "Let us hear which will laugh loudest! Think not to frighten me with your deviltry. Come witch, come wizard, come Indian powwow, come devil himself, and here comes Goodman Brown. You may as well fear him as he fear you!"

 

브라운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대인 클로이즈 부인, 목사, 구킨 집사,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페이스마저도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자 자신의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청교도적 자신의 이상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인디언 마술사도 악마도 브라운에게는 허상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브라운은 사실 십자군 전쟁과 중세의 마녀 사냥에서 순진하게 가톨릭의 지배 계층이 허울로 내세웠던 정당성을 순진하게 믿었던 대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브라운은 청교도라는 권위가 내세운 정당성을 비판적 시선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정신적 시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브라운은 청교도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의지를 대신해 줄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청교도의 노예로 절락시켰다. 이는 독일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악의 평범성과 맥을 같이 한다. 아이히만이 비판적 사고의 부재로 히틀러의 수많은 유태인 학살에 한 역할을 담당했듯이 브라운도 그의 조부가 퀘이커 여자를 채찍질하고 부친이 인디언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그런 청교도의 만행에 암묵적 지지자였다. 브라운 자신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브라운은 악마들로 뒤덮인 숲에서 악마와의 단절을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악마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브라운은 자신이 이 타락한 세계에서 정조를 지키는 마지막 수호자로서의 자부심이 충만하지만 타락한 세계의 원인, 타락한 세계가 무서워하는 악마에 대한 근거의 결핍으로 그의 자부심은 광기로서 비추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관과 자신이 부정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관의 충돌이 그를 더욱 광기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Either the sudden gleams of light flashing over the obscure field bedazzled Goodman Brown, or he recognized a score of the church members of Salem village famous for their especially sanctity. Good old Deacon Gookin had arrived, and waited at the skirts of that venerable saint, his reverend pastor. But, irreverently consorting with these grave, reputable, and pious people, these elders of the church, these chaste dames and dewy virgins, there were men of dissolute lives and women of spotted fame, wretched given over to all mean and filthy vice, and suspected even of horrid crimes.

 

브라운의 광적인 반항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고 나약함을 나타내는 역설적 표현이었다. 단수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래서 세일럼 마을의 신성한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범죄라도 저지를 것 같은 악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브라운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모든 당위성이 해체되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브라운의 이 당위성에 대한 믿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의 어떤 경험보다도 더욱 큰 충격적 경험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런 브라운의 경험은 서양 문명의 수천 년간 전개되어온 이성중심주의의 파괴에 대한 상징이었다. 서양의 이성중심주의는 육체에 대한 정신의 지배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플라톤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양의 철학은 항상 이성의 주체인 정신이 탐욕적이고 본능적인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고히 해왔다. 그래서 육체의 논리, 즉 본능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 아이라는 존재는 이성의 논리의 의하여 훈육되어야 할 존재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성의 완성체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존재가 벌이는 악행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서 수천 년 동안 공들여 만들어져온 이성중시의 논리는 토대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이는 물론 모든 어른이 이성의 완성적 존재라는 가정을 근거에 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같은 위대한 사유의 철학자조차도 히틀러의 인종우월주의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이성주의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한 무의식의 연구는 기존 이성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단죄의 역할을 하였다. 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가지는 혁명성은 프로이트 자신도 인지하고 있어서 자신의 책의 출판을 새로운 세기를 여는 1900년에 맞추어 출판하기 위하여 출판 시기를 몇 년 미루었을 정도였다. 절대적 이성의 힘으로 통제되는 통합된 주체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서양 지성인들의 전제는 무의식의 발견으로 분열되고 통합될 수 없는 주체라는 새로운 시험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This night it shall be granted you to know their secret deeds; how hoary-bearded elders of the church have whispered wanton words to the young maids of their households; how many a woman, eager for widow's weeds, has given her husband a drink at bedtime and let him sleep his last sleep in her bosom; how beardless youths have made haste to inherit their father's wealth; and how fair damsels-blush not, sweet ones-have dug little graves in the garden, and bidden me, the sole guest, to an infant's funeral.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서 자신 스스로를 깨끗이 지키려는 청교도(Puritan)에서도 인간의 악행이 되풀이 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나이가 많이 들어도 자신의 욕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교육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인가? 결국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이제 없는 것인가?

이런 물음은 자칫 인간 혐오주의로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허무주의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허무주의는 사람들이 가장 피해야하는 사유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요즘 많은 사람들을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몰아가는 것의 원인 깊숙한 곳에는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 사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무주의가 우울증의 형태뿐 만이니라 전 사회·국가를 아우르고 변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관을 지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염세주의적 세계관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프로이트가 우리의 주체가 분열되어 있다고 밝힌 것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를 억누르고 억압할수록 통제되지 않은 무의식의 욕망은 더욱더 커져간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텍스트에서 청교도의 교리가 세일럼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 억압이 사람들의 무의식을 왜곡하고 과장되게 표출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된 무의식은 해방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일럼 마을 사람들의 숨겨진 간음, 살인, 패륜, 낙태 등의 이런 악이 가지고 있는 욕망도 드러나야 한다. 그런 극한 악적인 면도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인 무의식으로 인정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깨끗한 것은 가장 더러움에서 나오고, 가장 밝은 빛은 가장 깊은 어두움에서 나온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더러움과 어두움이 없으면 깨끗함과 빛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처럼 선과 악은 서로 양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브라운을 악의 길로 인도하는 목소리가 악은 사람의 천성이라는 꼬임은 그 말 자체의 의미로는 옳은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의가 말하는 선과 악의 개념조차도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윤리관에서 좀 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이성의 주체에 완전히 억압되지 않듯이 선과 악의 윤리관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자칫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성이라는 속성이 물질적·정신적 권력에 자유로울 수 없는 왜곡된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성의 힘은 이제까지의 인류 문명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추후로도 이성의 중요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점이다. 브라운의 세계를 보더라도 세일럼 마을의 전 인원이 청교도의 정신을 밑바탕으로 삼아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악행의 진위 여부는 사실 명백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일럼 마을 사람들이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완벽한 조화 속에서 살았지만 브라운은 무언가 그들과 다른 면을 내재하고 있었다. 브라운은 자신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악마적 목적(evil purpose)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재촉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자신은 자신이 악마라고 생각하는 대상과 확고한 단절을 정립하고 빨리 자신의 이상인 아내로 돌아갈 것을 희망했다. 이것은 우리는 이러 브라운의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그는 자신의 Faith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는데 왜 악마적 목적인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재촉했을까? 그렇다면 브라운은 자신의 하녀에게 음란한 말을 속삭이는 교회의 연장자와 같은 위선자인가?

하지만 브라운을 세일럼 마을 다른 위선자들과 동등한 위치로 세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단편 소설의 후반 부분에서의 브라운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브라운이 다시 세일럼 마을에 복귀 이후 그와 마을 사람간의 급격한 단절은 충격으로서의 경험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제는 클로이즈 부인을 자신의 어릴 적 선생님으로도, 목사님의 설교를 열성적으로 경청하지도, 자신의 부인 Faith를 믿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 자신 주변 사람들을 혐오하는 냉혹하고 회의적인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숲으로의 하룻밤 여행이 그에게는 충격으로 작용하였지만 이는 모든 인간에게 같은 의미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운 내부에 숲에서의 경험과 반응을 일으킬 인자들이 있을 경우에만 그는 충격을 충격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Faith나 클로즈 부인, 구킨 집사, 목사 같은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브라운 같은 충격으로서의 경험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브라운은 자신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믿었지만 악마적 목적인 여행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이것은 브라운이 세일럼 마을의 다른 사람과는 달리 적나라한 현실을 의심하고 직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And when he had lived long, and was borne to his grave, a hoary corpse, followed by Faith, an aged woman, and children and grandchildren, a goodly procession, besides neighbors not a few, they carved no hopeful verse upon his tombstone; for his dying hour was gloom.

 

하지만 충격으로서의 경험은 항상 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충격을 외면할지 아니면 맞서 대응할지는 또다시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브라운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외면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악에 대해 혐오감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정의를 실현할 소명을 외면해 결국 수동적이고 비겁한 방관자로 남았다. 이는 니체가 인류에 대해 가장 경계했던 허무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니체가 허무주의가 팽배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건강한 인간상을 소망했듯이 호손도 브라운이라는 혼돈의 인물을 통해 이 세계가 좀 더 건강한 세계가 될 것을 역설적으로 희망했다. 그리고 또한 호손은 혼돈(Chaos) 속에서 조화(Cosmos)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by 그루브21 2014. 2. 6. 10:08

 

 

마르크스주의와 언어 철학은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소쉬르의 언어관에 반론을 제기하는 바흐친 학파의 언어관을 대표하는 책이다. 바흐친 학파는 이 책을 통해서 언어가 모든 현상에 개입(The word is the most sensitive index of social changes)하고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언어는 소쉬르가 말하는 자의성을 가지고 단순히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계급층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굴절된다는 것(Existence reflected in sigh is not merely reflected but refracted)을 바흐친 학파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 안에서는 계급투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언어는 수많은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진 다강세적(multiaccentuality)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 외의 이데올로기를 억압해 단일 강세(uniaccentual)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빈번히 접할 수 있다.

 

by 그루브21 2014. 2. 4. 19:58

 

 

즉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보인 모든 태도 하나하나가 이제는 전부다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삶은 어떤 기나긴 재판입니다.’

 

그는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 모든 사물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단하고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다. 왜냐면 그런 가치 판단 없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당위성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삶의 의미의 부재로 연결되어 허무주의적 사고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가치 판단의 기준이 또 다른 가치 판단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치 판단을 수행하는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외적인 형식을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의미의 척도로서 오해를 하기도 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에겐 살인은 하나의 증폭제 일뿐이다. 물론 증폭제 일뿐이지만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에 대한 해석은 표면위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살인이라는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살인으로 표면화된 해석이라는 특성이다. 뫼르소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황에서도 슬퍼하지 않는 패륜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뫼르소가 어머니의 시신을 보려고 하지 않고, 어머니의 나이도 제대로 기억 못하고, 밀크 커피나 찾는 모습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기본적인 인간의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해석은 그의 살인이라는 행위와 연결되어서 뫼르소에게 사형이라는 또 다른 살인과 연결되게 만든다. 사실 뫼르소는 표면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 스스로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는 개를 잃어버린 옆집 영감을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패륜아로서 해석이 살인과 연결된 것처럼 자기 자신도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의 부재의 혼돈이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이 작가가 뫼르소에게 해주고픈 해석이 아니었을까.

by 그루브21 2014. 1. 28. 19:57

 

테리 이글턴은 러시아 형식주의, 신비평을 비평함으로서 자신만의 문학 이론을 구축한 문학 평론가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 격인 로만 야콥슨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된 폭력을 표현하는 글이다. 다시 말하면 익숙한 일상어를 낯선 문학적 언어로 바꿔 독자로 하여금 권태로운 일상을 다시 낯설게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 소명이라는 것이다. 이글턴은 이런 그의 주장을 일부분 받아들이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형식에 비해서 내용을 홀대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한다. 여기서 내용은 문학의 시대·역사적인 맥락과의 관계를 말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그런 관계는 비평가의 일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문학성에서 일탈의 기준이 되는 일상 언어가 그 기준이 모호하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들의 일상 언어와 부두 노동자의 일상 언어가 같은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준이 모호한 일상 언어를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이글턴은 신비평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입장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다가간다. 신비평은 문학 작품의 작가나 시대 배경 때문에 나타나는 편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문학 그 자체의 텍스트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문학 비평의 사조이다. 그러나 이글턴은 이런 신비평을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소극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간주하였고 비평이라는 행위 자체가 넓은 편견과 믿음으로 엮여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런 편견과 믿음이 간혹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게 보이지만 사실은 계층에 따라 놀랍도록 일관된 일치성이 보인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은 각 계층의 이데올로기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글턴의 이런 이야기는 맑스주의의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 인식론과 경험론이 오랜 대치를 보인 것처럼 문학 비평도 맑스주의적 비평과 비맑스주의적 비평(시대·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는 보편적 가치를 찾는)의 오랜 대립의 역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by 그루브21 2014. 1. 24. 16:34

 

하나의 주적이 있다는 것은 그 주적외의 집단을 단결시키는 작용을 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주적을 제압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그와는 상관없는 생각도 수면위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광복 운동에서 김구와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외교파로의 분열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두 집단의 다름은 일제 강점기에는 그리 강하게 들어나지는 않았지만 독립 후에 목표가 성취되자 그 다름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은 인간으로서의 단결과 분열의 속성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밝혔듯이 스탈린 체제를 직접으로 풍자하기 위해서 만든 작품이었지만 우리는 꼭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스탈린보다는 보다 가까운 시간의 다른 인물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남을 억압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고발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작가 자신도 식민 관료로서 피식민지 국가의 사람을 억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도 이런 작품을 탄생하게 만든 계기로 작용했음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동물농장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의 필연적인 작품이었던 것이다.

동물농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복서라고 생각한다. 복서는 강직하고 부지런한 일반 서민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무비판적이라 오히려 권력 계층에게 이용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언뜻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운동에서 <근면·자조·협동>의 기치로 국민운동을 벌이는 모습에 호응하는 국민들 모습과 오버랩 되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많다. 새마을 운동이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순수한 운동이었는지, 혹은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당했던 운동이었는지는 좀 더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런 복서의 무비판적인 협조는 최고 권력자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었다. 최고 권력자에게 우리의 삶을 위탁하는 모습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무조건적인 호응보다는 상대적이고 권력과의 유동적인 긴장이 필요하다. 결국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패배한 이유도 어떤 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긴장 때문이지 않은가.

by 그루브21 2014. 1. 21. 16:13

 

 - The New Jazz Band 

 

by 그루브21 2014. 1. 18. 22:31

 

루카치와 니체는 공통적으로 허무주의적 사유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21세기 접어든 현 시점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니체는 그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천대에 대해 사후에 다시 재평가 받으면서 보상받고 있지만 루카치의 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당시대에는 크게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제는 그저 낡은 이론으로 취급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니체는 그의 사유로 하여금 그 시대의 흐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끔 하였지만 루카치는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 루카치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수긍이 가는 면이 존재한다. 모더니즘의 작품들은 사람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작품에 대한 접근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 루카치는 모더니즘 작품에서의 이런 우울을 인간의 본원적 특성으로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해석의 난해성을 일으키는 과도한 형식의 실험이 본래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잃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이런 특징조차도 시대의 맥락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루카치는 간과하고 있다. 1·2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이 자연스럽게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 분야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지배 혹은 사살이 합법화되는 시대에서 어떤 긍정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도할 정도의 다양한 형식의 실험은 단지 예술은 그 시대의 반영으로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움의 추구로서 예술을 보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끝없는 긍정을 통해서는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 해체·분열적 경험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by 그루브21 2014. 1. 10. 16:28

 

윌리엄 골딩의 장편 소설 파리대왕은 일·이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모멸을 담은 작품이다. 또한 작가 자신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직접 참여한 해군 출신이라는 점은 이 책이 방관자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 참여에 의해서 생산된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책의 주제 중에 주목할 것 중 하나는 민중의 부정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은 사실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적인 분자를 말한다. 이런 주체적이지 않은 수동적인 민중들은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에 따라 자신들의 색깔을 부여받게 된다. 그래서 지도자가 랠프인지 아니면 잭이냐에 따라서 그 집단 구성들의 모습과 행동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가 인종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세계 지배를 주장했을 때 독일 민중들은 몇몇 양심적인 소수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실질적 지지자들이었다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회의적인 세계가 계속 유효하다고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텍스트에서의 일방적인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결국 파괴의 상징인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종식은 일시적이라고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의 출간은 2차 세계대전이 종식 된지 얼마 안 지난 1954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시대 사람의 불안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by 그루브21 2014. 1. 3. 17:24

 

Moll Flanders에서 나타난 도덕과 욕구와의 불일치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왜 선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는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행위 그 자체가 기존 권위 체계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그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구성원들에게 은연중에 선함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함이란 표면적으로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법 등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을 뜻하지만 사실 내면적으로는 사회 지배 계층의 논리에 반기를 들지 않는 선함(순종)의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렇듯 권력자는 인간의 선 즉 기존 체계에 순종하는 인간상을 보이지 않게 강요함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인간의 의무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추구 속에 이런 권력자들의 책략이 숨어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양 세계에서는 권력자들 자신을 위해서 특히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악용하였는데 이런 흐름은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고 결국에는 악은 선에 의해 극복되어져야할 존재로서 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오직 선으로만 존재해야한다는 주장을 강요받고 악은 지극히 없어져야 할 존재로서 인식되어졌다. 하지만 선과 악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시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니체(Nietzsche)는 선과 악을 서로 대립적 존재로 볼 수는 있지만 서로의 존재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한 양극적인 대상으로서 인식하였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그의 선과 악에 대한 새로운 시선으로 기존의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런 니체의 선언은 아직까지 남아있던 중세적 그리스도 세계관의 몰락의 선언이었다.

또한 스피노자(Spinoza)는 선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장하였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다른 동물들이나 심지어 신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것으로 생각했다.(스피노자, 윤리학) 스피노자 이전에는 서양의 그리스도교뿐 만 아니라 동양의 유교 사상처럼 이런 인간의 욕망을 무시하고 억제되어야 할 존재로서 보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이는 인간의 욕망 자체가 이기심의 원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욕망은 악에 가까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은 선이나 악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었다. 스피노자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 사실상 우리의 삶 자체가 욕망의 발현이고 사람들은 그 욕망의 에너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욕망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평가는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그리스도교가 절대적 본질이라 정의한 선과 악에는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그 시대의 사회적 욕망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욕망은 지속적으로 변화해감에 따라 개인의 욕망도 영향을 받고 변화해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욕망이라는 것도 하나, 하나의 개별 욕망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때문에 개개인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욕망과 개인 욕망의 관계도 사회에서 개인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호 관계로서 이해되어져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과 악의 관계에 대한 기존 윤리관에 반론적인 새로운 생각들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선악의 윤리관이 이 세계에서 우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같은 새로운 생각들로 인해 기존 윤리관의 절대성은 헐거워졌음을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이런 헐거워진 풀림이 18세기 초의 소설인 다니엘 드포 (Daniel Defoe)의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을 통해 어떻게 발현되었고 이 소설이 그 풀림의 어떤 단초가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하겠다.

 

2. 권력의 음모

 

I Was continu'd here till I was eight years Old, when I was terrified with News, that the Magistrates, as I think they call'd them, had order'd that I should go to Service; I was able to do but very little Service where ever I was to go, except it was to run of Errands, and be a Drudge to some Cook-maid, and this they told me of often, which put me into a great Fright; .... I told her that if she wou'd keep me, I wou'd Work for her, and I would Work very hard. (p11~12)

 

몰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삶을 암묵적인 사회 약속에 억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서 개척해 나갈 줄 아는 인물이었다. 8살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판사의 요구에 극한 공포심을 느꼈지만 그녀는 유모에게 바느질과 방적일로서 그녀를 돕겠다고 해 결국은 하녀로서 살아야할지도 몰랐던 위기를 모면한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몰 같은 비천한 배경을 가진 아이라면 하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였다. 몰의 시대는 의무 교육 같은 장치가 보장되는 현재와는 다르게 계층적 질서가 확고해서 어릴 적부터 계층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8살 정도의 어린 여자 아이가 당시대 사람이라면 자기가 속한 계층에 따라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 혹은 의무를 거부하고 그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몰은 왜 이례적인 일탈이 가능했을까?

피지배 계층의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배 계층의 논리를 적극적이든, 강제적이든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지배 계층 정도의 동등한 위치와는 비할 수는 없지만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요소들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배 계층과 피 지배 계층의 관계는 계약적 관계라는 특성을 띤다. 그러나 지배 계층이 자신의 권력을 더욱 더 확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 기만적인 전략을 추가로 사용하게 된다. 이런 기만성으로 전략의 목적을 숨길 수 있고 피지배층으로 하여금 그 전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전략에 대한 수용에 대한 은밀한 보상으로 그런 작용이 더욱 더 고무되었다. 이런 기만적 전략의 문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카스트(Caste) 제도이다. 간디도 문제 제기하지 못한 절대적인 인도의 오랜 신분 제도는 윤회와 업을 대표로 하는 특유의 내세관과 결합하여 그 권력을 더욱 더 강화되었다. 각각의 계급에 맞는 확고한 임무가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세적 세계관이 고양시키는 현실 세계에 대한 무감각이 피지배층이 자신의 신분적 질서 따른 한계를 지배 계층에 항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18세기 초의 몰이 살았던 영국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 사회 같은 강력히 고정되고 내세관이 만연한 사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와 유사한 논리가 분명 존재한다. 기존의 서양 특유의 신분 질서와 천당과 지옥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인 내세관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영국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 의하여 이미 17세기 중반에 왕권이 무너졌고 후에 명예혁명으로 인하여 왕권의 권위의 하락은 더욱 고정화되었다. 이런 왕권의 몰락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빨랐고 시민 혁명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혁명보다 무려 100여년 빨랐다. 그리고 영국의 왕이 가톨릭 교회에서 독립한 교회의 수장이었다는 점에서 왕의 권위의 몰락은 종교적 권위의 몰락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이런 영국 특유의 사회 요인이 몰의 권위에 대한 일탈적 경험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외적 상황뿐만 아니라 몰이 가지고 있었던 개인적 경험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몰은 감옥에서 출생하여 이후에 집시들과 함께 유랑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몰은 그들과 외모에서도 차이가 있어 집시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고 하였지만 이 기억이 몰이 자신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었다는 언급은 아주 주목할 만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집시(Gipsy)9세기 경 인도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해 지금은 한국, 일본 같은 몇몇 나라를 제외한 거의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유랑 민족이다. 이들은 특유의 타문화의 배타성과 방랑 기질로 인하여 집시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이런 집시들과의 어린 시절 유랑은 앞서 제기한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 어떻게 몰이 어떤 체계 즉 권력의 음모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특성을 갖게 됐는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3. 비도덕주의

 

But as this Work is chiefly recommended to those who know how to Read it, and how to make the good Uses of it, which the Story all along recommends to them; so it is to be hop'd that such Readers will be much more pleas'd with the Moral, than the Fable, with the Application, than with the Relation; and with the End of the Writer, than with the Life of the Person written of. (p4)

 

드포는 몰 플랜더스서문에서 이 글을 독자가 작가의 목적인 교훈을 통해 기쁨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정작 본문에서 몰이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는 드포의 서문과는 상당히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몰도 드포와 마찬가지로 도덕에 자유롭지 못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그녀의 행위와의 일치성이 보이지 않고, 뉴게이트 감옥에서 목사와의 만남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이만 하지만 결국 자신이 회개한 이유는 처형될 수도 있는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는 자기 고백으로 미루어보아 드포가 서문에서 말한 이 글의 목적과는 다르게 그녀의 이야기가 흘러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포의 서문과 몰의 서술의 상이한 분위기의 이유는 여러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드포 자신의 경험과 연관이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비국교자를 처리하는 지름길(The shortest Way with the Dissenter)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몰의 서문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자신이 왕당파의 일원인 것처럼 가상해 신교도를 모두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 글 때문에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친구의 도움으로 가벼운 벌만을 받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김현숙, 몰 플랜더스에 나타난 아이러니 참조) 이런 경험 덕분에 드포는 몰 플랜더스라는 소설이 일으킬 수 있는 논란에 대한 보험으로 서문을 그렇게 작성한 것이다.

이는 작가적 상상력이 사회의 억압적 윤리관과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모순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모순은 드포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몰에게서도 이런 모순은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몰 플랜더스 같은 범죄 소설에서 즐거움을 얻는 독자들에게서도 충분히 함께 공유될 수 있는 모순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욕망을 꿈꾸지만 그 시대의 윤리관 같은 당위성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그들 중에서 몰이 가장 그 당위성에서 자유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드포는 몰을 통해서 자신을 억누르는 당위성에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당당하지 못했고 독자는 몰 같은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행위로 위안을 삼았다. 반면에 몰은 비록 당위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사회적 신분·윤리관·법에 대한 일탈에 의하여 드포나 독자들에 비해 당위성에 가장 당당한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윤리관이란 선과 악의 이분법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이 동양과 다른 점은 선을 행함에 있어 나타나는 희생의 정당성을 신의 보상으로서 설명한다는 점이다. 반면 동양, 특히 동북아권의 윤리는 군주, 부모, 형제, 이웃 같은 타인으로 그 선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윤리관이 지배적인 서양 사회에서의 몰은 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그 사회의 이단적인 인물이다. 비록 신께 참회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고는 있지만 이는 자신의 정당화의 한 수단에 불과했고 그녀의 진정한 주요 관심은 현실 세계였다. 그녀의 이런 현실감은 특히 돈에 대한 집착으로서 극대화된다. 그녀는 아직 완전히 인생관이 완전히 잡히기 전이었던 순진한 시기에서의 큰아들과의 첫 성경험 때도 그에 대한 대가로 내민 돈을 그녀는 일말의 죄책감 없이 받는다. 이는 몰의 특수한 개인적 배경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지만 18세기 초 영국이 가진 사회 전체적인 변화에 의해 돈의 의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세 시대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 Francis의 청빈생활이 많은 사람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지만(한천궁, 몰 플랜더스 소고) 청교도 혁명이 영향을 끼치면서 빈부에 대한 가치 척도가 바뀌게 되었다. 탐욕의 상징이었던 부가 이제부터는 근면의 상징으로 전도되면서 가난한 대중들의 부의 추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바로 이런 풍조는 몰의 돈에 대한 집착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큰 형의 배신으로 인해 남성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 돈은 몰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으로 더욱 승화되었다.

 

4. 욕망의 희생물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통해서 이성과 욕망을 상반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인간의 욕망을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충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 내지 규칙에 따라 작용하는 힘 내지 움직임이다.(김주미, 몰 플랜더스의 개인적 자유) 이런 관점에서 은행원 남편이 죽었을 때 몰이 결국 절도의 세계로 자신을 내모는 모습을 보면 이 욕망이 단순히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을 알게 해준다.

 

I am very sure I had no manner of Design in my Head, when I went out, I neither

knew or considered where to go, or on what business; but as the Devil carried me out and laid his Bait for me, so he brought me to be sure to the place, for I knew not whither I was going or what I did.... This is the Bait; and the Devil who I said laid the Snare, as readily prompted me, as if he had spoke, for I remember, and shall never forget it, 'twas like a Voice spoken to me over my Shoulder, take the Bundle; be quick; do it this Moment; (p151)

위의 몰의 서술을 통해서 그녀는 단순한 충동이나 목적에 의한 행동이 아닌 알 수 없는 악마에 의하여 자신이 조종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 악마가 그녀 자신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윤리관으로부터의 비난을 모면하고자 했다. 그 이전까지 그녀는 이미 사회의 윤리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지만 절도는 그녀에게 완전 새로운 일탈이었기 때문에 악마라는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조정하는 악마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자신의 윤리적 도피처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절도는 그녀의 의식 안에서 충분히 인지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의식은 또한 앞으로도 그녀가 그런 상황에 내던져지게 되면 절도 행각 같은 일탈을 계속 벌일 것임을 이미 예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절도 행위가 자신만의 자유 의지로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면 한 개인의 욕망은 사회적 욕망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종되어지는 개인의 욕망은 자신이 사회적 욕망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실제로 몰이 처음부터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이유도 귀부인(Gentlewoman)이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돈으로 귀부인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은 그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시대가 돈이라는 물질적 수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살펴보자면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Enclosure) 운동 등으로 지방의 농민 등 하층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런 계급의 혼란 속에서 그들 자신들의 생존과 계급 상승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돈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하층민들의 욕망은 같은 계급에 속하는 몰의 욕망에 자연스럽게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욕망이 몰의 정체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는 의문스럽다. 몰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고 일생 내내 일관적인 관점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몰의 변함없는 캐릭터가 오히려 사회적 욕망과의 불일치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변화해 가는데 변화하지 않고 고정되고 영원한 신이 아닌 그녀의 일관성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이해의 어려움은 인간의 맹목성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몰은 자신만의 가치를 사회의 가치로 대치시켰기 때문에 본연의 자신만의 캐릭터가 드러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몰은 사회의 욕망에 의하여 억압되어 자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인물이다. 결국은 몰은 자신이 처음 본 존재인 개가 자신의 엄마라는 것을 영원히 믿는 오리 같은 존재이다. 자신의 자아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정시키고 자유롭게 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는 유연함의 부재를 겪는 몰은 사회적 욕망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5. 나가는 말

 

몰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의 창출은 기존의 권력의 체계, 기독교 윤리관의 억압, 이성중심주의 사유를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초월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 의미성을 배가시켜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그런 몰의 캐릭터가 남성 작가에 의하여 창출됐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몰 플랜더스는 이런 초월성과 함께 남성 작가에 의한 여성 캐릭터의 창출의 한계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 한계성은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같은 페미니스트(Feminist)가 지적하는 여성적 특징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스트가 남성성과 대비되고 여성만의 장점이자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유동성(fluidity)이 몰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의 원인을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남성 작가에 의하여 남성적인 혹은 고정적인 여성 캐릭터가 만들어 졌다는 말이다. 이는 앞서 말한 논증한 몰을 사회적 욕망의 희생자라고 보는 시각과 함께 몰의 고정된 캐릭터의 원인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몰을 남성 작가에 의하여 왜곡되어진 캐릭터라고 단정 짓더라고 몰 플랜더스라는 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왜곡도 결국은 우리 세계가 가지는 세계의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몰이 여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장치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 확대는 자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페미니스트적 관점, 특히 분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 보편적 관점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by 그루브21 2013. 12. 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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